캐롤라이나 1부 천사님의 깃털이 쏟아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얀 깃털에 포근히 잠기는 발목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한동안을 가만히 있었다. 차갑다.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나온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면 좀 더 따뜻해 져도 될 텐데. 왜 이렇게 차가운 걸까. 고개를 들어보니 누나가 날 웃으며 보고있다. 다만 누나의 순한 눈매만은 잔뜩 흔들려서,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를 띈다. 하얀자위가 금방 빨개진다. 누나의 눈이 사정없이 눈물을 떨군다. 조용히 다가와 날 와락 껴안는 두 팔에 난 조용히 말했다. "두려워하지마. 누나가 좋아하는 안개꽃도 노란 카나리아도 언젠가는 하늘나라에 가는 법이잖아." "넌 내가 아니잖아.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렇지?" "아니." "그러면? 너도 날 따라와 줄 꺼야?" 누나는 예정된 죽음이란 공포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하지만 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니. 내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에겐 어머니가 없었다. 아버지도 없었다. 배냇머리 시절부터 날 먹이고 입히고 재운 것은 누나 뿐이었다. 누나는 나의 어머니고 아버지였다. 누나는 내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난 어릴 적 어느 땐가부터 부모가 우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누나는 날 키우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못난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진 것 없는 열 여섯살의 소녀. 특출한 재주도 가진 것도 없는 미성년자가 넉넉한 돈을 벌 방법은, 학교를 그만두고 미성년자 출입금지의 유흥업소에서 일하거나 몸을 파는 것뿐이었다. 난 그렇게 헌신적인 누나 손에서 자랐다. 날 버렸다면 훨씬 좋은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누나에게 언제나 고마웠다. 가난에 찌든 삶이었지만, 온갖 진흙물은 누나가 뒤집어썼다. 헌데 에이즈라고 한다.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으니 곰팡이 쓴 천장이 날 무심하게 내려다본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누나의 몸 어딘가가 저 곰팡이 쓴 천장처럼 변해가고 있는데, 왜 난 몰랐던 걸까. 서글픔보다 치밀어 오르는 것은 차가운 두려움. 왜 그런 더러운 병 따위 걸려버린 거야! 누나가 없으면 난 어떻게 하라고! 나 혼자 세상의 진흙물을 뒤집어 써야 하는 거야? 보호해 주고 감싸주는 사람 없는 이런 좁고 곰팡내나는 방에서 혼자 아등바등 살기 위해 악을 써야 한다고? 미안해 누나! 누나가 죽는 것을 슬퍼해야 하는데, 비참해질 내가 더 가여워 누나! 자신이 없어. 누나 없는 세상에 사는 게 죽는 것 보다 두려워. 심장이 터질 듯 치밀어 올랐던 격정이 북받힌 고함으로 사라지고, 비틀거리며 더러운 부엌으로 가서 과도를 뽑아 들었다. 섬뜩한 은빛에 짐짓 소름이 돋는다. 찌르고 나면 후회할 지도 모른다. 누나가 에이즈라는 것을 알고 난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난 죽지 못 할 거야. 이 비정상적인 광기와 두려움은 곧 냉정한 이성과 치밀어 오르는 슬픔에 침몰되어 버릴 것이다. 난 칼날을 내 쪽으로 하여 거꾸로 쥐고 눈을 감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죽어야 돼. 죽어야 돼. 죽어야 돼. "불쌍한 아이구나." "누구야!" 놀라 눈을 뜨니 흰 수염이 얼굴을 풍성하게 덮고 있는 왠 백인 할아버지가 애처로운 얼굴로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빨간 산타모자에 빨간 장화? 잠시 넋을 잃은 사이 배불뚝이 노인은 내 손목을 쳤다. 화끈한 통증에 앗하는 순간 노인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었다. 그러자 마술처럼 공중에서 칼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슬퍼도 목숨을 끊으면 안 된단다 얘야." "상관하지 말고 나가주세요!" 남의 집에 무단침입한 주제에 이제는 여유롭게 뚱뚱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기까지?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까 전까지의 처절했던 심정과 비장한 각오는 다 풀려버려 맥이 빠진다. 저 사람 때문에! 이제는 죽지 못할 텐데! "오호. 내가 끼어들어서 억울한가 보구나." "나가 주십시요!" "못 하겠다." "예?" 노인은 한 번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라인(螺人)이 네가 죽으면 내가 슬플테니까 말이야." 내 이름을 어떻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노인은 천천히 그가 누구이며 나를 어떻게 아는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나타난 따뜻한 우유 한 컵을 내게 건네며. 그의 이름은 산타클로스, 나이는 너무 많이 먹어 세얼리기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직업은 착한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것인데, 크리스마스에 산타가 직접 방문하는 아이들은 아주 적은 수의 아이들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실상은 요정들과 루돌프들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러 가는 것이다. 십년 전 산타클로스는 선택받은 백 명의 너무나 착한 아이들을 만나러가기 위해 크리스마스 날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그는 스위스부터 시작해서 북해, 지중해,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마침내 아시아까지 왔는데, 유난히 잠이 짧아진 요즘 사람들 때문에 시간이 모자라 그만 백 번 째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산타클로스는 백 번째 아이를 내년에 만나기로 하고 북극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산타클로스는 백 번 째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미뤄진 게 십 년. 그 아이가 바로 나라고? 잠시 이 할아버지가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산타클로스는 그 뚱뚱한 몸으로 공중부양을 해서 날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네가 언제나 신경이 쓰였단다. 혹시 실망하지 않았을까, 산타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야." "그래서 십 년 전에 내가 달라고 빌었던 선물을 주려고 왔다 이건가요?" 웃기지도 않아. 이미 열 여섯살인 내가 여섯 살짜리가 가지고 놀던 걸 받아봐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아니 아니. 이미 큰 네가 로보트를 가지고 싶어할 리는 없다고 생각 했단다.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려고 했는데 이제와 보니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구나." 내 비웃음에 배알도 좋게 웃는다. 불쾌해져서 퉁명스레 물었다. "그래, 제가 지금 필요한 게 뭐예요?" "누나를 살리고 싶지?" "!..살릴 수 있나요!" 바닥에 급히 앉아 그의 두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누나만 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뭐든지! "너희 누나가 죽으면 다른 세계에서 태어날 거다. 여기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지. 만약 네가 누나대신 그 곳에 가면 누나는 죽지않고 이곳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네 누나는 너의 복을 대신 물려받고 너는 다른 세계에서 네 누나가 얻을 복을 받게 된다." "예?" "운명은 정해지지 않는 법이지만 사람이 타고나는 행운은 정해져 있는 법이지. 너는 운이 좋은 편이고 네 누나는 운이 지독히도 나쁜 아이라...네 누나가 그토록 고생한 것에 비해, 너는 고아원에 버려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지." "그걸 어떻게..." "내가 어떻게 나쁜 아이와 착한 아이를 구분할 수 있겠니. 그건 세상 방방곡곡에 살고있는 요정들이 아이들에 대해 알려주기 때문이란다. 그 중에는 너와 네 누나 이야기도 있었어." 산타클로스는 익살맞게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네 누나는 이곳에서 너무나 불행했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운이 좋아질거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잊게 되겠지. 자신이 불행했던 것도. 그렇게 되면 같은 영혼이라도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니겠니." "제가 다른세계에 가면... 전 이 몸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 너도 누나도 행복해질 거다. 물론 네 누나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곳에서 지내도 좋다. 그 때는 내가 너에게 풍족한 재산을 주마. 어떻게 할 테냐." 풍족한 재산과 누나의 죽음. 낯선 곳에서의 삶과 이곳에서의 삶. 답은 금방 나왔다. 의지하던 누나가 없어진다는 자체가 두려운 거니까. 아아, 무서워 누나. 하지만 아무리 멀리 있어도 누나가 살아만 있다면. 날 기억하고 있다면. 미안해 누나. 이기적인 날 용서해 줘. 누나가 모든 것을 잊고 다시 태어난다면 더 행복할지도 모르는데. 미안해! 미안해! "누나를...살려주세요." "역시 착한 품성은 변하지 않았구나." 산타가 손가락을 한 번 휘두르자 놀랍게도 벽 한 쪽이 커다란 벽난로로 변했다. 산타는 벽난로 밑으로 몸을 집어넣더니 내게 손짓을 했다. 내가 그 손을 잡자마자 산타는 엄청난 속도로 날 잡고 위로 솟구쳤다. 몸이 순간 납작해졌다는 생각이 든 순간, 우리는 어느새 하늘 위를 날고있는 마차 위에 앉아 있었다. 눈에 익던 허름한 골목과 집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가자 루돌프! 공간을 뛰어 삼십 번 째 세계로! 이호!" 루돌프는 한 번 히잉히잉 웃더니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난 떨어질까 놀라서 마차를 세게 붙잡았지만 산타는 즐겁다는 듯이 껄껄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마차는 쉴 새 없이 하늘을 날았다. 저 아래로 책과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넓은 태평양과 섬들도 지나갔다. 가는 길에 히말라야산맥도 보고 갠지스 강과 미시시피 강도 보았다. 불빛 찬란한 뉴욕과 영국의 런던, 독일의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의 파리도 구경했다. 크리스마스의 도시들은, 불빛에 마치 살아있는 듯 반짝였다. 그렇게 쉴새 없이 날아서 멀미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 할 쯤, 하늘에서 놀라운 것을 보았다. 얼음으로 덮인 하얀 땅 위로 마치 색색의 배일을 흔들어 놓은 듯한 광경. 아름다워. "오로라는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지. 무지개도 그렇지만, 무지개는 너무 좁아서 말이야." 우리는 오로라 사이를 날기 시작했다. 이게 꿈은 아닐까. 색색의 오로라가 우리의 머리위로, 아래로, 옆으로 흔들리고 있다. 손을 뻗으면 그 색에 물들지는 않을까. 뻗어보았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다.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만이 내 손을 찰싹이고 도망갈 뿐. 또다시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보이는 것은 거대하게 우거진 침엽수림과 하얀 눈밭이었다.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두 개의 달. 시리도록 새하얀 달 두 개가, 창백한 얼굴로 날 내려다본다. "이 곳은 이제 밤이 되었나 보군." 산타는 그러면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내 감상을 방해했는데도 본인은 전혀 깨닫지도 못하는 눈치다. "여기가 삼십 번 째 세계인가 하는 곳인가요?" "그래. 우리가 날고 있는 이곳은 엘위론왕국이지. 동화속에서나 나오는 왕과 왕자들이 있는 곳이란다. 물론 이건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조심해야 할거야. 자! 그럼 슬슬 왕도로 들어가 볼까!" 마차는 하늘에서 내려와 땅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덜컹거림이 심해서 울렁거림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마차는 거대한 성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갑옷을 입는 두 남자가 커다란 창을 들고 다가와서 뭐라고 외친다. 산타는 그들을 향해 딱딱하고 강한 발음의 언어로 뭐라 말했다. 두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를 통과 시켜주었다. "뭐라고 한 거예요?" "손자가 아파서 급히 왔다고 했지. 마을에는 사제가 없으니까 말이야. 헤일론의 사제는 의사나 다름이 없단다. 그러고 보니 내 정신도 참!" 산타는 먹으라면서 빨간 알약 하나를 내게 주었다. 그것을 입에 넣자마자 스르르 입 안 에서 녹는다. 으. 너무 쓰잖아! "엘위론 말을 이제 할 수 있을거다. 그것도 완벽한 표준어로." 이제는 산타가 무슨 말을 해도 놀랍지 않다.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산타의 말대로 난 길거리를 지나가는 이상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도시는 매우 가지런했다. 곳곳에는 길다란 횃불이 서 있었고, 경사가 급한 지붕을 가진 이층 이상의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길가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아마 하수구인 것 같다. 산타는 마차를 커다란 건물 앞에서 세웠다. 그리고는 따라오라고 했다. 나와 산타는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은 매우 넓었는데, 빽빽한 문서가 들어찬 거대한 책장들이 여럿 있고 커다란 책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뭔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산타는 그 중 한 사람 앞으로 가더니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했다. 그러자 서류를 보는데 정신 없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집과 땅을 양도하려고 왔소." "성함은?" "캐롤 산타클로스요." "어느 분에게... 혹시 저 분입니까? 이리 오세요." 집과 땅을 양도하다니? 산타는 날 향해 빙그레 웃기만 한다. 남자 앞에 산타 클로스와 나란히 서자 남자는 내게 두 장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인주 비슷한 것에 엄지손가락을 찍어 지문을 남기고, 서명을 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본 적이 없는 글자군? 다른 나라에서 오셨는가 보지요. 엘위론어로 다시 한 번 밑에 적어주십시오." 고민할 틈도 없이 신기하게 머릿속에 글자가 떠오른다. '라인'이라고 서명을 하자 남자는 '성도 쓰셔야.' 하고 재촉한다. 산타클로스의 속삭임에 할 수 없이 앞에 캐롤이라고 쓰자, 남자는 그제야 군말 없이 커다란 도장을 쾅쾅 찍었다. 대체 왜? 누나를 살려 준 것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은 끝난거잖아? 산타는 날 데리고 건물을 나오더니 다시 날 마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움직였다. 산타의 흥얼거리는 캐롤을 듣다가 결국에 소리 높여 묻고 말았다.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예요!" "그럼 널 처음보는 곳에 내버려두고 그냥 갈 줄 알았니? 그냥 십 년간 널 기다리게 한 값이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말이야. 허허허. 돈 보다는 누나를 선택한 네가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하단다." "그건 누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절 위해서...!" "이유야 어쨌든 넌 누나를 죽게 할 수 없었던 것 아니니. 그렇지? 어쿠. 우리 루돌프도 그렇다고 고갯짓을 하는 구나!" 마차는 한참을 더 신나게 달리더니 우리가 지나쳤던 성문을 빠져나와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마차는 왕도에서 그리 멀지 않는 작은 숲으로 향하더니 숲 안으로 들어갔다. 숲 안 호수를 지나 마차가 내려선 곳은 하얀 벽돌로 지어진 집 앞이었다. 이 층의 아담한 집은 마치 유럽에서나 볼 법한 그런 집이었다. 집 앞에는 그네가 걸려있고, 앉을 수 있는 벤치도 있었다. 이게 내 집이라고? 곰팡내 나는 셋방이 아닌, 이런 집이 내 거라고? "왕도의 '하인상회'에 네 이름으로 돈을 맡겨 두었다. 또 집에 찾아보면 보석이랑 돈이 조금 있단다. 내일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것저것을 할 테니 알아두고." "감사합니다." 기뻐해야 하는 것도 그렇지가 못하다. 얼떨떨한 것도 있지만, 이런 곳에서 누나랑 같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넌 여기에서 삼 계급인 중인이다. 여기는 신분제니까 조심하도록! 그러면 이제 영영 볼 일은 없겠구나. 행운을 빈다." 산타는 그 말을 끝으로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난 산타가 준 열쇠를 들고 한동안 마차의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누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내가 사라졌다고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욘은 투털거리기를 계속했다. 돈 있는 것들의 하는 양은 이미 알고 있지마는 왜 구태여 도시와 어중간하게 떨어진 곳에 집을 짓느냔 말이다. 그 탓에 애꿎은 사람 고생시키고 말이야. 욘은 '하인상회'에 소속된 청년으로 정신나간 의뢰인 때문에 여러 잡역부들과 함께 고급 가구와 식료품들을 마차에 싣고, 왕도와 가까이 있는 호수의 숲으로 가는 중이었다. 호수의 숲은 또한 왕도에 사는 귀족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귀족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골치 아프기도 하다. 그래서 욘의 심기는 영 좋지 않았다. 안가겠다고 버티다가 상사에게 타박 맞은 것도 한 몫했다. 욘은 투덜투덜 대다가 옆에 앉아서 한 곳에 조심히 놓인 의자를 보며 눈을 빛내는 존의 머리를 한대 쳤다. "왜 때려!" "보기 애처롭다. 어차피 가지지도 못할 것, 보고 있으면 뭐하냐?" "그래도 꿈은 가지라고 있는거야. 혹시 아냐. 내가 쉰 살 정도 되었을 때는 이런 의자에 앉아 품위있게 술 한잔을 하고 있을지." "아서라. 개꿈은 빨리 깨는 게 좋아." "야! 넌 꼭 내 무지개 빛 환상에 초를 처야 직성이 풀리냐!" 으르렁대는 욘과 존을 보며 주위 사람들은 큭큭 웃어댔다. 그 중 상자 위에 앉아있던 콧수염 사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네 놈들은 싸움으로 시작해 싸움으로 끝나는 게 하루 일과로구나. 그만 해라. 엉? 덩치만 커다란 것들이 맨날 앙증맞은 말싸움이라니. 쏠린다 쏠려!" "예예~ 그만 합죠. 그런데 형. 이거 쓰는 사람은 누구야?" 존이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콧수염 사내를 보자 사내는 피식거렸다. "예쁜 아가씨는 절대 아니니까 안심해라." "쳇. 뭐야." "의뢰인이 그러던데 몸이 안 좋은 도련님이 호수의 숲에 있는 저택에 산다고 하더군. 중인 계급의 소년인데 부모도 없는 것 같고, 대신 물려받은 유산은 꽤 되는가 보지? 혼자 살 건가봐. 그걸 봐서는 내성적인 것 같고." "헹. 결론인즉 부모 잘 만난 중인 남자애가 이걸 혼자서 다 쓴단 거잖아." 잔뜩 배알이 꼴린 욘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이 가구 값만 다 합쳐도 우리 같은 사람이 십년을 살아도 될 돈이야. 아우. 진짜 짜증나네." "넌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이냐? 어쨌든 그 도련님이 이렇게 우리 상회 물건을 사니까 장사가 되는 거잖아. 넌 그럼 돈 있는 사람들이 근검 절약해서 상회가 폭삭 망했으면 좋겠어?" "어휴. 그래. 넌 쉰 살이 되서 돈 있는 사람이 될 입장이라 이거지?" 또다시 으르렁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콧수염 사내는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하얀 집 한 채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귀한 하얀 돌로 지어진 집이, 그 주인이 얼마나 고상한 취향을 가졌는지, 얼마나 재력이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기에 콧수염 사내는 욘과 존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시켰다. 마차가 집 울타리 앞에 멈춰 서자 사내는 존과 욘을 데리고 집 앞에 서서 소근거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알았다구." 사내는 욘의 퉁명스런 대꾸에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하고는 문을 탕탕 두드렸다. "하인 상회에서 왔습니다!" 한참 뒤에 문이 삐꺽거리며 열리자 욘은 '얼마나 잘난 상판인지 보자'하는 생각으로 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무서워 보이는 자신의 눈에 놀란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두고두고 뒷담을 까 주리라. 하지만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욘은 차마 눈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칠흙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검은 눈동자. 특이한 디자인으로 된 붙는 옷으로 드러나는, 너무나 가느다란 뼈대와 날렵한 체구. 그 뿐만이 아니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답게 얼굴에는 잡티하나 없었다. 입술은 창백한 붉은 색이었다. 약간은 지친 듯한 기색으로, 그러나 너무나 품위 있고 당당하게 서 있는 소년의 모습에, 욘은 감탄하고 말았다. "전 제온이라고 합니다. 가구와 식료품, 그외 여러 물품들, 잡역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지금 일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일은 언제쯤 끝납니까." 완벽한 엘위론어라는 게, 소년이 하는 말을 두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왕도의 귀족이나 구사할 법한 완벽한 발음에 욘은 멍해지고 말았다. 중인이라고? 천만에. 왕족을 해도 되겠어. 그 날 욘은 소년에게 말을 붙이려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만 몇 개 하고는 좌절하고 말았다.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서 존에게 비웃음을 잔뜩 들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꿈에서 누나를 보았다. 내가 사라져서 잔뜩 걱정을 하고 있던 누나는, 의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고는 기뻐하고 있었다. 의사는 오진이 있었던 것 같다며 누나가 에이즈에 걸리기는커녕 매우 건강하다고 말했다. 누나는 기쁜 소식을 가출한 내가 돌아오면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부풀어 있는 듯 보였다. 저기 앞에 누나가 있는데. 난 여기서 한발 짝도 움직일 수 없어. 그래도 누나가 살아서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어. 누나가 내 행운을 다 가진 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난 여기서 누나의 행운을 가지고 살아갈게. 누나는 날 대신해, 난 누나를 대신해 살아가는 거야. 눈을 뜬 순간 내가 울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나가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깨끗하고 이 멋진 커다란 집에 나 혼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순간. 눈물을 닦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어제 많은 사람들이 고치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둔 내 집은 한없이 황량하게만 느껴진다.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환한 빛이 틈새로 새어들어 눈을 찌른다. 이 곳에서의 두 번째 아침. 그래. 이렇게 한 없이 안으로 침몰할 수만은 없어. 이제 혼자서 이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니까. 우선 당장 이 곳에서 입는 옷부터 사자. 그런 생각에 집을 나섰다. 서울의 겨울처럼 차가운 바람이 내 귀와 손을 괴롭힌다. 눈 사이 드러난 맨 땅을 밟으며 어제 온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걸었다. 덕분에 길을 잃을 것 같지는 않다. 얼마나 걸었을까. 가는 길에 호수를 지나 한 한 시간쯤은 걸은 것 같다. 버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이곳에서는 버스대신 말이지. 어느새 주위에 있던 울창한 나무들이 사라지고 회색 빛 성문이 보인다. 전과 같이 서 있던 병사는 나와 여러 사람들이 지나치는데도, 수레만을 검사할 뿐 사람에겐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아마도 짐 검사만을 하는 듯 싶다. 성안을 들어서니 전의 조용한 분위기가 아닌, 잔뜩 활기에 찬 분위기가 느껴졌다. 밤과 낮의 차이인 걸까? 장사치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리고, 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정신 없이 오가고, 한 구석에서는 잔뜩 때와 가난에 찌든 얼굴을 한 어린 거지들이 눈을 빛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을 사람들은 경멸어린 눈으로 본다. 여기서도 빈부의 차는 어쩔 수 없구나. 몇몇 사람들이 날 이상하다는 듯이 흘끔거리는 것을 의식하며, 사람들에게 물어 옷가게를 찾았다. 그 중 안내해주겠다는 한 아이를 따라 나서려는데, 그 아이보다 잘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갑자기 나타나 욕을 하며 아이를 내쫓았다. 어안이 벙벙해서 보고 있자니, 아이는 도망가듯 골목으로 사라져 버린다. 여자아이는 아까의 험악한 표정은 간데없이 날 보며 방긋 웃었다. "나으리. 절 따라오세요. 옷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왜 저 아이를 내쫓은 거지?" "그야 사기꾼이니까요. 저 녀석은 나으리 같은 분을 꾀어다가, 허름하고 별 볼일 없는 가게로 모신 뒤 웃기지도 않는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먹는다구요. 저 녀석의 꾀죄죄한 상판 보셨죠?" 그런거였구나. 산타가 주고 간, 청바지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나도 모르게 매만졌다. 여자아이는 날 데리고 이리저리 길을 누비더니,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서 들어서자 한 중년 여자가 반갑게 맞는다. 여자는 어떤 식으로 옷을 맞출까 하는 말 밖에 묻지 않았다. 아마 여기는 사이즈 별로 지어진 옷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하긴, 과학이라는 것과 동떨어져 보이는 이런 곳에 의류 공장이 있을리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미리 만들어진 옷이라는 것도 없을 테 지. 여자는 줄자로 내 몸 여기저기를 재면서 쉴새 없이 재잘거렸다. "재단사 생활 삼십년 만에 이런 옷은 처음이네요. 헌데 호수의 숲에 있는 저택에 배달해 드리면 된다고요?" "예." "호호. 죄송하지만 하인을 보내시면 안될까요? 거긴 저희 같은 사계급이 들락거리기엔 좀..." "혼자삽니다. 하인은 없어요." "어머! 안 되요!" 안 된다니? 여자는 내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주었다. 성 밖에 있어서 도적이나 갖은 외적이 쳐들어오면 병사들의 도움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은 귀족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곳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여자는 어쩐지 귀족들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고, 나도 딱히 캐묻고 싶은 기분은 없기에 좀 어두워진 마음으로 여자가 하인이나 노예를 사라고 충고하는 것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나보다 윗 계급의 사람이라. 굽신거려야 하는 건가? 아무리 빈부차가 있어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정해놓던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란 내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의 일원이 되어버렸으니.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되지? 일주일 후에 하인을 시켜 옷을 찾으러 오라고 하는 것을 흘려들으며 옷가게를 빠져나오자, 아까 전의 여자아이가 조르르 따라왔다. 여자아이는 당돌하게 손을 내밀었다. "수고비 주세요! 돈에 따라 노예시장이나 인력시장에 안내해 드릴 수도 있어요!" "노예시장? 인력시장?" "예! 노예시장은 노예를 사고 팔구요, 인력시장은 갖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뽑는 곳이예요." 아까전 옷가게 주인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돈은 방금 다 써버리고, 보석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망설이다 청바지에 넣어둔 스니커즈 한 개를 꺼내 여자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냐고 투정을 부리던 아이는, 내가 한 개를 까서 녀석의 입에 넣어주자 곧 눈을 함지박만하게 뜬다. "이거! 그거죠! 왕족들이나 귀족들만 먹는 그거요!" "그거라니?" "맛있어! 선생님 말이 맞았어. 공주님, 왕자님들은 이렇게 맛있는 걸 먹는다고. 좋아요! 이건 엄청 비싼 거죠? 제가 오늘 나으리 길 안내는 책임질께요. 아니, 길안내뿐만 아니라 뭐든지 하죠! 그런데 한 개 더 없어요?" 몇 백 원 하는 스니커즈의 가치를 너무 높게 잡는 거 아냐? 헛웃음을 짓다가 한 개 더 녀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는 함박웃음을 짓더니 따라오라며 내 앞으로 달려나갔다. 노예를 살 생각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사고 판다는 것이 궁금했기에 잠시 구경만 하려고 했을 뿐, 인력시장인가 하는 곳에서 하인 몇 만을 고용하려고 했다. 평등사회에 살던 내가, 그것도 가난에 시달리던 내가, 내게 굴종하는 사람을 보며 마음이 편할 일은 없는 것이다. 더불어 노예제도는 말도 되지 않는 거니까. 흥정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손과 발이 묶인 채 줄줄이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새벽시장에 신선한 생선을 경매하는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 높혀 가격을 부르고 자신과 같은 사람을 사고 팔고 있었다. 줄에 손발이 묶인 채 길게 서 있는 사람들은 마치 노끈에 묶인 생선들같다. 흥정은 놀랍도록 빨리 진행되었다. 누군가 한 명을 지목하고 적당한 가격을 부르고 나면, 개미의 더듬이처럼 쭉 뻗은 수염의 노인이 서류에 뭔가를 끄적이고 손짓을 한다. 그러면 삼두근 이두근으로 무장한 우락부락한 장정 몇이, 지목 당한 사람을 새로운 주인에게 넘기는 것이다. 넘겨지는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는 듯 더없이 순한 양처럼 굴었다. 말도 안 돼. 이보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광경이 어디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무너뜨리며 인간을 물건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폭력. 이미 저 사람들은 그 폭력에 길들여져 인간 아닌 인간이 된 거겠지. 난 이것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저들은 내가 아니니까. 또한 나 같이 작은 개인이, 그것도 이방인이 이 세계의 시스템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나으리. 안 사세요? 제가 골라볼까요?" 반짝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여자아이. 이런 아이까지 사람을 물건으로 보다니. 문득 돋는 소름에 도리질을 치며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개미더듬이를 닮은 수염의 노인이 어느새 내 앞에 서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내가 인상을 쓰자마자 그는 뜬금없는 말을 한다. "보겠소?" 무슨 소리지? 노인은 재차 말했다. "좋은 물건들이 따로 있는데 보겠냔 말이오. 저런 하(下)품은 눈에 안 차는 듯해서 하는 말이요." "아니요, 사양하겠습니다." "한 번 보기나 해요. 이 쪽으로." 생각도 없는데 왜 멋대로 날 휘두르려고 하는 것인지. 화가 났지만 안 오고 뭐하냐는 듯한 노인의 눈빛에 아이와 함께 노인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노예시장의 뒤편에 있는 건물로 날 이끌더니 곧 건물 안 계단으로 내려갔다. 건물의 눅눅한 공기가 정말 불쾌하다. 인상을 쓰면서 내키지 않지만 계단을 밟았다. 지하에는 온통 쇠창살이 박힌 감옥이 여러 개 있었다. 아니, 감옥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정확할 것이다. 인간을 가두고 사육하는 우리. 그곳을 지키던 남자 여럿이 노인을 보고 인사하는 것을 보니, 노인은 이 거대한 우리의 주인인 것 같다. 우리에는 여러 남자와 여자들이 따로 격리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사람이 오건 말건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팔을 좌우로 휘둘렀다. "자. 이게 다 제법 괜찮은 물건들이오. 어떤 것을 원하오? 칼 제법 쓰는 놈? 아니면 잠자리 기술이 기막힌 계집? 원하는 데로 말해 보시오." "아니요. 저는 이만 돌아가는게..." "어허. 이런 중(中)품도 차지 않소? 좋아. 그럼 좀 더 걸어야겠군. 아아, 가겠다는 말은 그만해요. 보고 나서 결정해. 내가 장담하지. 내가 이래뵈도 노예상에서는 유명한 안목을 지녔으니, 이런 내가 고른 상품들이 눈에 안 찰리가 없소. 그건 분명 만족스러울 거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걷기만 하는 노인 때문에 분통이 터졌지만, 나가기가 애매해서 어쩔 수 없이 노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계단을 한 계단 더 내려가자 번듯한 문 하나가 보였다. 그 앞에는 지하 이층과 마찬가지로 우락부락한 남자 몇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남자는 노인의 명에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에 느껴지는 짙은 꽃향기. 그것은 방 안 곳곳에 새워진 저 붉은 꽃나무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 풍성한 흰 양탄자위로 한 때의 미남, 미녀들이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까 전까지의 노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차림새로 바닥에 드러눕거나 앉아있었다. "어떻소? 이게 내 최고의 상품들이지." "정말 예쁜 사람들이예요. 그렇죠, 나으리?" 여자아이는 내 곁에서 호들갑을 떨었고, 노인은 빨리 선택하라는 듯 내게 눈웃음을 쳤다. 노인의 쭉 찢어진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혐오스럽다. 당신 눈에는 저렇게 예쁘고 잘 생긴 사람들이 그저 물건으로만 보이는 건가?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과 함께 밀려드는 혐오감에 등을 돌렸다. 내 누나도 저렇게 아름다웠어. 내겐 하나뿐인 누나였지만 물건 취급당했지. 그 때 나직한 목소리가 날 잡아끌었다. "절 데려가십시요." 여자와 남자들 사이에 거만하게 앉아있던 소년. 마치 자수정을 으깨어 놓은 듯한 보랏빛 머리카락에, 차가워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인형같다. 소년은 당당한 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데려가라니. 자신을 사란 말인가? 나보다 키가, 한 주먹만큼 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소년은 더 없이 매혹적인 미소를 작게 흘리며 내 손을 끌어 입을 맞추었다. 매혹적인 블레탈의 외모와 냉정한 태도는,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같은 노예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마력적인 것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악명 높은 노예상 자바도 블레탈을 함부로 팔지 못했다. 거만하고 아름다운 소년은 열 여섯 살에 자바의 노예가 된 후, 어느 곳으로도 팔리길 거부했다. 그리고 이 년간, 이 곳에서 상급 노예들의 우두머리로 자리잡았다. 블레탈은 오늘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얼굴만 잘난 노예들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할 게 그다지 많지 않다. 몸을 섞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또한 수다를 떠는 건 영 블레탈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때 굳게 잠겨져 있는 문 너머로 뭔가 시끄러운 말소리들이 들렸다. 블레탈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미녀, 미남들을 뿌리치고는 허리를 일으켜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 번씩, 장삿날이 아닌데도 자신들을 사려고 오는 사람이나, 자바에게 돈을 주고 노예들과 하룻밤만 즐기기 위해 오는 자들이 간혹 있었다. '분명 살 찐 돼지새끼겠지. 보석을 잔뜩 옷에 붙힌.' 블레탈과 비슷한 생각인 듯, 곁에 있던 미남 미녀들도 일그러진 얼굴로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돈에 사고 팔리는 처지이지만 이왕이면 괜찮은 사람의 밤시중을 들었으면 하는 게 노예들의 심리니까. 하지만 문이 열리고, 개미새끼(그들은 자바를 그렇게 부른다)가 누군가와 함께 들어 온 순간. 블레탈의 잔뜩 경멸어린 눈동자는 금방 그 빛이 대번에 변해버리고 말았다. 블레탈은 개미새끼와 함께 들어오는 한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상한 옷을 입은 소년은 창백하고 지친 얼굴색을 띄고 있었다. 놀랍게도 타자리하국에서나 볼 수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어, 타자리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저 아기의 것처럼 고와 보이는 맑은 상아빛 피부는 타자리하 사람의 윤기 나는 갈빛이 아니었으니까. 저 귀하게 자란 듯한 소년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잠자리를 상당히 밝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과 같은 상품의 노예를 사러 올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자신을 선택하겠지. 저 소년이라면 괜찮다는 생각을 문득 한 블레탈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시선은 자신을 무심히 스쳐지나갔다. 아니 블레탈 뿐만 아니라 다른 노예들도 관심 없다는 듯 바라볼 뿐. 이제는 숫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였을 것이다. 괜히 짜증이 난 것은. "절 데려가십시요." 개미새끼와 주변 노예들이 경악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건 말건, 블레탈은 자리에서 일어서 소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내려보니 더욱더 매력적인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블레탈은 소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라기엔, 굉장히 가냘픈 손이다. 블레탈은 소년의 손에 키스를 하고는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귀하게 자란 듯한 이 소년은 잠자리 노예같은 것은 애초에 생각에도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좋은 게 아닌가. 자신이 소년에게 밤의 쾌락을 가르쳐 주면, 소년은 자신에게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노예의 부와 권력은 주인의 총애에 따라 결정되는 법. 자바의 말투를 보아하니 귀족은 못 되는 중인인 것 같지만, 자바는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바에야 그리 굽신거리는 바가 없는 걸 보면, 이 소년이 중인이래도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뜻 아닐까. 재산 없고 권세 없는 허우대만 좋은 대부분의 귀족보다야 상당한 재산을 가진 중인이 훨씬 낫지 않은가. 소년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린다 싶었다.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다. 블레탈이 확신하는 순간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이 소년을 사겠습니다." 살짝 양도 서류를 보고 알아낸 새로운 주인의 이름은 캐롤 라인이었다.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의 덤으로 따라온 하급노예들의 옷을 테론-고급 옷을 전문으로 파는 엘위론에서 유명한 의상실-에서 맞출 정도로 부자인 새주인은, 이상하게도 데려온 하인이 한 명도 없었다. 또한 갓 마시장에서 산 말을 도통 타고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본래 노예라는 게, 주인에게 함부로 말을 걸만한 위치가 아닌 관계로 블레탈은 주인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하지만 유난히 창백한 새 주인의 얼굴을 보고, 블레탈은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말에 타시지요." "탈 줄 몰라." 이게 왠 소리인가. 중인 이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말을 탈 줄 아는데. 특히 실무직에 많이 종사하는 중인들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가 많은 걸 아는 블레탈로써는 황당하기가 그지없었다. 중인들은 머리가 좋아 여기저기서 찾는 이가 많은 것이다. 블레탈은 하는 수 없이, 하급 노예가 쥐고있던 말고삐를 빼앗은 뒤 훌쩍 말 위로 올랐다. 그리고는 라인의 손을 붙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새주인은 당황하는 듯 싶더니, 이내 곧 자신의 허리를 감아온다. 다른 노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등을 감은 새주인의 팔만을 의식하며 말을 몰았다. 자신도 그렇지만 특히 저런 하급노예같은 경우, 하는 게 힘을 쓰는 무식한 짓거리 뿐이니 체력이 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지칠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주인의 저택은 놀랍게도, 귀족들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인 호수의 숲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집을 이루는 건 귀한 흰 돌. 블레탈은 주인을 따라 집에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집은 사람의 온기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하인은? 노예는? 그리고 주인의 가족은? 보통 새로운 주인을 맞으면, 그 집의 집사가 나서서 이것저것을 가르쳐 주고 지시하기 마련인데. "일층의 빈방과 욕실을 쓰도록 해. 난 위층의 방과 욕실을 쓰니까." 그 말만 하고서 위층으로 가 버린 새 주인. 마침내 어떤 상황인지 블레탈은 깨달았다. 새 주인은 이런 곳에서 하인하나 없이 혼자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짓을. 내가 물건처럼 사버린 사람들을 일층에 내버려두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이층으로 올라온 것은 지독할 정도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평생을 팔려 산다는 것과, 하룻밤을 팔며 산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팔리는 것은 누나와 같은 사람들인데. 특히 그 애. 보랏빛의 머리카락과 눈이 굉장히 아름다웠던 녀석. 그 소년은 내 또래가 틀림없었는데. 혹시 나도, 또래의 친구들이 굽신거리는 것을 즐기던 녀석들을 부러워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 녀석을 산 이유가 없다. 아무리 충동적이었다지만. 그런 놈들처럼 다른 사람들이 내게 굽신거리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한참을 뛰는 가슴을 붙잡고 침대에 앉아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내가 돈으로 산 사람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문만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그 녀석이 들어왔다. 굉장히 잘 생긴, 보랏빛의 소년. "죄송합니다.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 허락없이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또래의 내 앞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이런 걸 보고 싶었던 거야, 이라인? "일어서." 참다못해 말하니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쩌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또래인 내 앞에서 무릎꿇는다는 게 화날텐데도. "기분나쁘지 않아?" "무엇이 말입니까?" 한참만에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너와 나는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노예중에는 나이가 많은 분을 섬기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사오나, 저는..."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날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주인님을 흠모하게 되어, 이리 섬기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이해를 못 한다. 어쩌면 노예제가 당연한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 그리고 그것을 빼앗겼을 때의 분노를 이해하라고 하기엔 무리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들이 날 미워해야 할 이유도 내가 미움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 허탈함에 한동안 멍해졌던 것 같다. "...이름이 뭐지?" "블레탈입니다." "난 라인. 주인님이라고 하지말고 라인님으로 불러." 그래.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자. 생활관과 가치관, 그리고 모든 제도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 나 혼자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고수한다면 나만 괴로워질 뿐이니까. 어차피 낮에 노예시장의 모습을 외면하려고 했던 나니까. 할 수 있어. 난 이기적이니까. 내가 산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했지만, 그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블레탈을 제외한 세 사람. 노인인 샘과 두 소년 피에, 흄은 욕실을 사용하는 것도,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도 잘 하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하기 전까지 변은 집 밖의 뜰에서 보고, 씻는 것은 비누도 없이 그저 물을 퍼서 한 번 뒤집어 쓸 뿐, 그것으로 끝이었다. 게다가 내가 눈 앞에 보이기만 하면 허리를 굽히고, 차마 내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뭐라 물으면 당황해서 더듬대며 말하고, 내 인상이 조금만 안 좋아진다 싶으면, 바닥에 절을 하면서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다. 식사 또한 그렇다. 내가 기껏 차려놓고 먹으러 오라고 하면, 식당으로 들어올 생각을 않는 것이다. 그들의 말로는 주인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단다. 결국 세 사람은 거실에서 알아서 먹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블레탈은 나와 같이 잘만 먹는데 말이지. 그래, 블레탈은 틀리다. 잠시 포크를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곧 보랏빛 눈을 마주쳐온다. "...하실 말씀이라도?" 고개를 젓고 다시 먹는데 집중했다. 능동적이고,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 그것이 블레탈과 다른 세 사람을 확실히 구분 짓는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먼저 말을 건네거나, 질문하는 일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시키는 데로만 하던 그들이기에, 자유의사라는 게 거의 마비되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렇다면 왜 블레탈은 이렇게 틀린걸까. 식사를 마친 뒤, 종이와 연필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예전에 본 이곳 사람들의 말이 있었지만, 날씨가 추운 탓인지 그 귀족인가 하는 것은 이 근처에서 전혀 볼 수 없으니, 거리낄 건 없겠지. 내가 본 책에 의하면, 이곳 엘위론은 상당히 북쪽에 있는 추운 나라라서, 여름이 아니면 산 정상에 있는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정도로 추우니 지금 막,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이 때에는 사람들이 바깥활동을 자제하는 것이다. 한참을 걸어 호수 앞에 앉았다. 하얗게 표면이 얼어붙은 호수와 눈밭은, 주위를 둘러싼 굵고 높은 침엽수들과 한데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답다. 그 덕에 잠시 또 멍하니 있었다가, 서둘러 화판을 무릎에 올리고 며칠 전부터 시작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깔린 눈으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스며들었지만 오들오들 떨면서 연필을 계속 놀렸다. 내 연필 움직임에 따라 신비로운 호수와 눈밭이 화폭에 담길 때마다, 가슴이 아려와서 한숨이 나온다. 그 때 내 어깨에 부드러운 망토가 내려앉았다. "추우실까 하여..." 고개를 돌리니 블레탈은 이미 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 따라왔던 걸까. 이런 친절은 누나외의 사람에게는 받은 적이 없었는데. 고마움보다는 당황스러움에 한동안 망토자락을 들여보고 있다가, 자락을 쥐어 모았다. 그렇게 그림을 계속 그리다가, 잠시 언 손을 들어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내가 공을 들여 그려놓은 그림을 보다가, 그것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하늘에 붉은 빛이 감도는 것이, 또 밤이 오나보다. 뭐, 겨울이니까 밤이 짧은 것은 당연한 일일테지. 망토를 몸에 덮어썼는데도, 이 지독할 정도의 추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쩐지 일어나니 더 추운 느낌에, 손에 입김을 쬐며 서둘러 집을 향해 걸어갔다. 빨리 가지 않으면 사방이 껌껌해져버려 앞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전등하나 없는 이 우거진 숲의 밤은, 내가 살던 대도시의 밤과는 차원이 다른 흑야(黑夜)니까. 조금씩 들려오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를 의식하며 숲길을 걸어갔다. 보통 때 보다 내가 늦게까지 그림을 그렸던 것일까. 내가 집 가까이 다다르기도 전에 해가 저버려, 그만 사방이 어두컴컴해 지고 말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로 보이는 회색빛의 잔영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갔다가는 나무에 부딪히거나, 다칠지도. 아니 그걸 떠나서, 길을 찾을수가 없잖아.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을 뻗어 나무를 더듬으며 앞을 가려는데, 조금 멀리서 불이 갑자기 확 피어올랐다. 놀라서 잠시 멈칫했는데, 횃불에 잠시, 보랏빛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블레탈?" 그가 걸어서 내 앞에 서자, 하얀 얼굴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횃불에 드러났다. 섬세한 얼굴과 길고 우아하게 뻗은 속눈썹. 그 안에 자리잡은 차가운 보랏빛의 눈동자. 아름답다라는 건 이런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남자에게 쓰기엔 뭐한 단어지만. "...기다렸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는 블레탈. 기다렸다는 것은, 날 마중나왔다는 소리일까. 헌데 왠지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혹시 추운 건가? 그러고 보니 겉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았잖아. 그렇군. 내가 두르고 있는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생각 없이 둘러서 느끼지 못했는데, 내 것이 아닌 블레탈의 것인 것 같다. 하긴, 노예인 블레탈이 함부로 주인인 내 방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주인을 위해 하나뿐인 망토를 내어 줄 정도로 신분의 격차란 큰 것이란 말일까. 왠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고맙다. 여기서는 당연하게 노예가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블레탈과 난 한 걸음 서로, 거리를 둔 채로 집으로 향했다. 집 가까이 가니, 집 문 앞에 횃불을 든 세 인영이 어른거린다. 좀 더 가까이 가니, 두 소년과 한 노인이 날 보고 반색을 하며, 허리를 굽힌다. 그들은 내게 허리만 굽힐 뿐이었지만, 알 수 있다. 날 걱정했던 거다. "고맙다." "당치도 않습니다요, 주인님!" 역시나. 내 말에 늙은 노예 샘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어제처럼 화판과 종이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확 밀려드는 찬 기운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기분 좋게 맑은 공기를 음미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추워서 곧 포기해 버리고, 몸을 웅크리고 말았다. 호수로 가서 여느때와 같은 장소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하면 이 좋은 경치가, 화폭에 다 자리잡기 때문에 평소보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해서 정신없이 집중했다. 추워서, 손가락이 얼어 중간에 호호 불어야 했지만, 회색빛의 선 하나 하나가 이루어져 나무와, 하늘과 눈 덮힌 호수가 되는 그 기쁨은 추위를 잊게 만든다. 기분이 좋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어제 배경은 대략 다 마무리지었기에, 너무나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등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나무 뒤에 한 소년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블레탈?" 내가 부르자마자, 블레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한 자태로 내게 다가왔다. 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굽슬친 보랏빛 머리카락이 더없이 화려하다. "거기서 뭐했던 거지?" "혹시라도 산짐승이나 도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여 살피고 있었습니다." 산짐승, 도적이라니. 그렇다면 날 지키고 있었다는 건가? "어제도?" "예." 얼굴이 창백해 보여. 내가 두르던 외투를 벗어주려고 하자, 블레탈이 내 손을 잡았다. 왠지 약간 화난 것 같다면 착각일까.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요." 그러면서 내가 들고 있던 것들을 한 손에 들은 뒤, 남은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왠지 어색한 마음에 잡힌 손을 빼지도 못했다. 그 때 블레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인님은 화가이십니까?" 한 때 그런 꿈을 꾼 적은 있지만. "그렇게 보여?"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내 기분을 좋게 하려고 한 거짓말이든 진심이든 간에, 처음으로 나에대해 물었다는 게 기쁘다. 블레탈이 아무리 세 사람에 비해 다르다고 해도, 주인과 노예로서의 거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변하는 게 없어서, 사실 쓸쓸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블레탈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 "너는 뭔가 잘 하는 게 없어?" 잠시 주저하다가 물으니, 블레탈이 조용히 답했다. "...검과 글을 조금 압니다." 검이라니. 아무리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지만 음지에서 일하는 누나를 둔 나이기에, 블레탈이 무슨 용도로 노예시장에 있었던 것인지는 짐작하고 있다. 외모가 빼어난 사람들을 최고로 값을 매겨서 한데 모아 두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바로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 블레탈이 검을 안다니? "저는 원래 이년 전까지만 해도 무투회를 위한, 카바예란이었습니다." 카바예란? 블레탈은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더 이상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바람에 다시 분위기는 냉랭해져 버리고, 우린 아무 말 없이 집으로 향하기만 했다. 그 때 차가운 뭔가가 얼굴위로 떨어졌다.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날 데리고 뛰기 시작하는 블레탈 때문에, 난 멋도 모른 채 따라 뛸 수밖에 없었다. 폐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서 힘들기 짝이 없었지만, 블레탈은 지치지도 않는 듯 하다. 더 이상은 무리야. 블레탈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블레탈이 내 앞에 자신의 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어서 업히십시요." "헉헉...헉... 왜, 왜 이렇게...헉헉... 뛰어가야..." "어서요!" 힘들어 죽겠는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소리를 치다니. 화가 나지만, 일단 블레탈의 말대로 블레탈에게 업혔다. 그러자 블레탈은 지치지도 않는 듯이 날 업고 집을 향해 뛰어갔다.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반색을 하는 샘과 피에, 흄이 보였다. "다행입니다, 주인님! 다행입니다!" "대체..."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블레탈의 등에서 내리자마자, 블레탈은 지친 듯한 모습으로 한쪽 벽에 기대어 서고, 피에와 흄은 문을 꼭꼭 잠근 뒤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의아함에 그들을 보다가 그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제 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그냥 주방으로 가기로 했다. 어쨌든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하니까 말이다. 저녁식사가 끝난 지 한 참 후, 늦은 밤 무렵이 되어서야 난 왜 그들이 낮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굳게 잠겨진 나무로 된 창문이 쉴새 없이 덜컹거려서, 의아함에 열자마자 엄청난 눈보라가 내 방안으로 들이닥치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커튼이 쉴 새 없이 날리고, 방안에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겨우 겨우 안간힘을 다해 창문을 닫고 나니, 그제야 내 방안이 조용해졌다. 뭐, 이미 엉망이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한숨을 내쉬며, 이미 사정없이 눈이 떨어져서 축축해진 바닥을 보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탁자에 있던 책은 저 쪽으로 가고, 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곱게 침대위에 자리잡은 이불은 사정없이 밀려나 있고. 가장 싫은 건, 따뜻했던 방안이 순 식간에 추워졌다는 것이다. 이불을 침대위로 끌어올리고, 떨어져 있던 책을 탁자위에 올린 후 의자에 앉았다. 다시 책을 읽으려고 하니, 자꾸 덜컹거리는 창문소리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한 켠에 세워 두웠던, 화판과 종이를 가지고 방에서 나와 일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다다르니,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장작의 불꽃에 밝게 어른거리는 빛을 보니, 역시 생각했던데로 그림을 그리기엔 적당한 장소인 것 같군. 앞에 쭈그려 앉아 겉에 모포를 두르니, 내 방보다 훨씬 따뜻하기까지 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펼치는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블레탈이다. 나처럼 놀랐는지, 잘 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한 아름다운 얼굴이 보기 좋게 굳어져있었다. "안 자?" "불을 지키러 왔습니다." 그러고는 난로 앞에서 불쏘시개로 이리저리 장작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그런 블레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연필을 잡고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블레탈은 불쏘시개를 내려놓더니, 불을 지킨다는 것 때문인지 내 뒤 멀찍이 앉았다. 신경이 쓰여 등을 돌려보니 마치 모델 같은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있다. 추울 텐데. "내 옆에 앉아." 말을 하니, 그제야 블레탈이 긴 다리를 움직여 내 옆에 앉았다. 다시 그림을 한창 그리기 시작하는데, 사람의 골격이 하나씩 잡히기 시작할 쯤, 블레탈의 나직한 미성이 들려왔다. "누구를 그리시는 겁니까?"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나의 누나. 이제는 평생 볼 수 없는, 하나뿐인 나의 가족. 정신없이 기억 속에 남은 누나의 그림자를 쫓으며, 스케치를 했다. 가느다란 체구, 약간 안짱끼가 있는 다리, 갈색의 웨이브진 머리카락, 잘 입는 종아리까지 오는 원피스까지.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그림을 그리며 물으니 대답이 없었다. 흘낏 바라보니, 왠지 아까 전보다 표정이 더 차가워진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애써 블레탈에게로 쏠리는 신경을 가다듬으며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다정한 검은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그림이 완성되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내가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다행이야. 욕하고 저주했던 재주인데. 이 재주 때문에 누나의 모습을 잊을리는 이제 없는 거니까. 어젯밤 몰아치기 시작하는 눈보라는 잠잠해질 생각을 않는다. 이렇게 된 이상은 책으로 하루를 때우는 수 밖에 없지만,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문 때문에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별 수 없이 일층으로 내려가자, 피에와 흄이 벽난로 앞에서 뭔가를 하는 게 보였다. 잔뜩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에,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다가가니, 그 때 마침 동글동글한 나무로 된 구슬이, 내 발치에 굴러왔다. 그것을 허리 숙여 주으니, 피에와 흄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이런, 결국 방해하고 만 건가? "무슨 게임이야?" 둘은 입만 우물거릴 뿐 말하지 못했다. 내 눈치를 보는 건가. "화내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해." "정말이죠 주인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히 웃는 흄의 등을 치는 피에. "죄송합니다, 주인님! 일은 안 하고 놀기만 한 저희를 벌해 주십시요!" "아니야."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반응이긴 하지만, 흄이 처음으로 내 앞에서 긴장을 풀었다는 게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피에는 여전히 얼굴색이 안 좋았지만 흄은 내 시선에, 좋아라 바닥에 굽혀 앉아 구슬을 이리저리 튕기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내가 덩달아 중간에 이것저것을 묻자 그제야 피에도 조금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나중에는 나도 끼어 구슬치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심심했던 참이기도 하고, 이 기회에 피에와 흄과 친해져 보자는 생각에 한 구슬치기 게임은, 내가 어릴 때 하던 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지 구슬이 예쁜 유리로 된 것이 아니라, 나무로 깎은 겉에 무언가를 칠한 것이란 게 틀릴 뿐이지. "주인님, 정말 잘 하시네요?" 흄의 감탄에 조용히 웃었다. 전기세가 아까워 텔레비젼도 마음껏 보지 못했던 나로써는,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피구나 축구, 술래잡이 같은 것 밖에 놀게 없었다. "아주 어릴 때만 하고 그만뒀는데, 용케 그 때 실력이 남은 모양이네." "중인분들도 이런 걸 하십시까?" 피에가 궁금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나야 잘 모르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잘 모르겠지만, 난 어릴적에 구슬을 가지고 놀았어. 다만 이런 나무로 된 구슬이 아니라, 유리로 된 구슬이었지." "귀한 유리로 된 구슬이란 말입니까?" "굉장히 멋질 것 같네요!" 대체 뭘 어떻게 상상하는 것인지. 유리구슬이라고 해 봤자 몇백원 하던 거였는데. 하긴 여기선 유리가 귀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이야기를 끝으로 우리의 게임은 계속되어, 흄의 승리로 끝이 났다. 또 한 판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샘이 등장하면서 별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요 녀석들! 놀려면 방에서 놀 것이지, 게다가 주인님과 이런 걸 하다니!" "샘. 난 재미있었으니까 괜찮아. 내가 하자고 한 거니까." 내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샘은 피에와 흄의 머리를 억지로 숙이게 하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연신했다. 그러고는 두 녀석을 억지로 끌고, 할 일이 있다며 방으로 가버렸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벅적했던 난로 앞이, 순식간에 썰렁해져버렸다. 어쩔 수 없이 식사 준비나 하려고, 주방으로 들어서는데 블레탈이 보였다. 보니까 물을 마시려고 들어 온 것 같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블레탈은 허리를 숙였고, 난 다가갔다. "물 마시려고?" "아니요. 물이 없어서, 눈을 받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블레탈이 든 항아리를 들여다 보니, 하얀 눈이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생각해보니, 수도관도 없는 이 곳에서 물을 서울에서 살 때 처럼 구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물에 대한 걱정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는데, 블레탈이나 다른 노예들이 이런 식으로 처리해 왔던 것 같다. 맙소사. "물은 어떤 식으로 구한 거야?" "지금처럼 눈이 쌓였을 때는, 눈을 받아오고, 얼음을 캐 오기도 합니다. 여름이 되면 근처의 호수에서 물을 퍼 와야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매일 샤워를 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람들의 고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바닥에 쌓인 눈을 내가 여태껏 그냥 먹었다니. 물론, 서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자연을 가진 이곳이지만, 내 뱃속으로 이상한 균들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보장을 할 수 없잖아? 블레탈에게 우선 항아리를 들고 있으라고 시키고, 아궁이의 장작에 불을 붙인 다음, 철로 된 냄비에 눈들을 부었다. 눈이 물이 되고, 마침내 부글부글 끓자마자 그제야 좀 안심이 된다. "블레탈. 다음부터 눈이나 얼음, 호수에서 가져온 물들은 저렇게 우선 끓이도록 해. 안 그러면 병에 걸리거나 기생충이 몸 안에 서식하게 될 수도 있어." "기생충?" "살아있는 것의 영양분을 갉아먹는 작은 벌레들을 말하는 거야. 보통 높은 열이 가해지면 죽어버리고 말지." 끓인물을 병에 담자, 블레탈이 뚜껑을 가져왔다. 뚜껑으로 닫고 한 곳에 올려놓는데, 블레탈이 왠 술병을 하나 가져와서 내게 내밀었다. 대체 이게 뭐야? 마시라는 건가? "블레튜고 입니다. 몸에서 열을 나게 해서, 추위를 막습니다." "추위를?" "라인님께서는 드시지 않는 것 같아서." 아. 기생충에 대해 알려 준 것에 대한 보답인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왠지 부끄러워 하는 것 같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냥 마시는 거야?" "그냥 마시기도 하지만, 음식을 만들 때도 넣습니다. 주로 고기의 비린내를 제거하지요. " 마개를 따니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지독한 술냄새가 확 끼쳐와,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 같다. 도수가 높은 것 같은데. 병을 입에 대고 약간 맛을 보니, 끔찍할 정도로 독하다. 열이 얼굴로 확 끼치는 것 같아서 금방 입을 때고 말았지만, 블레탈의 말처럼 몸이 따뜻해 지는 것 같아서 한 번 더 조금 들이키고 말았다. "외국에서 살다 오셨습니까?" "왜?" 내 행동이 그렇게 어색했던 건가. "라인님은 왠지 다른 분들과 많이 틀린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엘위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블레튜고를 알고있으니까요." 조심했는데도 그렇게 보였나보다. 대답하기가 뭐해서, 그냥 입을 다물자 블레탈은 인사를 하고 주방을 떠났다. 그러면 나는 음식이나 만들어야 겠다. 그래. 블레탈이 가르켜 준데로 블레튜고를 한 번 넣어봐야지. 이제 열 다섯이 되는 흄은 지나칠 정도로 밝은 게 장점인 노예다. 마음씨 좋은 평민 주인들만을 섬겼던 흄은, 그래서 배운 것도 없고 눈치도 없어서 좋은 노예라고 보기엔 문제가 있었다. 물론,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지만 말이다. 그 탓에 두 번째 주인이 죽고나자, 주인의 딸은 소년 노예 흄을 노예상 자바에게 바로 팔아버렸다. 그리고 흄이 세 번째 만난 주인이 바로 캐롤 라인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다. '와아. 멋진 도련님이다.' 흄이 처음으로 자신의 주인을 보고 생각한 것은 그것 뿐이었다. 밤하늘 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동자. 잡티하나 없는 피부에, 조용조용하고 기품있는 말투는 마치 어머니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 속의 왕자님 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새 주인은 더없이 고마운 분이라, 자신을 비롯한 다른 노예들에게 멋진 방까지 딸려주었다. 멋진 새 옷도 사주고 말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었다. '이걸 또 먹어야 되는거야?' 흄은 오늘도 어김없이 등장한, 주인님의 요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먹기도 힘든, 귀한 고기다. 하지만 주인님이 한 고기는 너무나 매웠다. 너무나. 덕분에 흄은 입에서 불이나는 진귀한 경험을 매일 저녁이면 하고있었다. 게다가 주인님은 엘위론 인이라면 누구나 식사시간 때 빼놓지 않는, 한 가지를 꼭 빠트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남기면 안 돼." 샘 할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흄은 억지로 고기를 입으로 쑤셔 넣었다. 게다가 주인님의 고기는 너무나 익혔다! 핏물이 조금은 배여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늘도 어김없이 입에서 불이 나겠지 하며, 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엉?" 안 맵다? 그것은 피에와 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인 듯, 다들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매운 맛 대신 혀가 아릿아릿한, 그리운 맛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드디어 주인님이 블레튜고를 넣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흄은 감동에 젖고 말았다. 주인님도 분명, 자신의 요리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정상적인 요리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그 때 블레탈이 식당에서 나오는 게 흄의 눈에 들어왔다. 눈이 부실정도로 화려하게 굽슬치는 보랏빛 머리카락은 어깨에서 출렁거리고, 언제나 그렇듯 하얀 얼굴에 자리잡은 보라색 눈동자는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블레탈은 샘 할아버지도 굽실거리는 사람인데다, 자신이나 샘 할아버지, 피에와는 달리 고급노예라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였다. "어떻게 된 거에요, 블레탈님?" 흄이 묻자 블레탈의 차가운 눈이 흄을 주시했다. 굉장히 무서웠지만 굉장히 궁금하기도 한 흄은 블레탈의 사나운 시선에도 꿋꿋이 버텼다. 주인님과 친한 블레탈이니 알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신이 주인님께 말씀 드렸소?" 그 때 샘이 끼어들었다. 블레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라인님께서 얼음이나 눈, 호수에서 끌어온 물들은 한 번 끓이고 쓰라고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난다고 하니 알아두도록. " 그러고는 욕실로 횅 하니 사라진 블레탈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에 흄은 피에에게 물었다. "블레탈님은 주인님의 음식을 좋아한 게 아니었어?" "너 바보냐? 강철의 목구멍을 가지지 않은 이상, 누구라도 주인님의 음식을 달가워하지 않을걸?" "아니, 블레탈님은 주인님이 같이 식사하자고 할 때 군말 없이 받아들였잖아. 우리야 주인님의 음식이 너무 끔찍해서, 혹시라도 싫어하는 거 주인님이 아실까봐 안 된다고 했지만. 그래서 블레탈님의 입맛이 주인님과 비슷한 줄 알았는데?" "그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야." "그게 뭔데?" "...너 바보냐?" 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바보야? 눈은 다음날이 되서 완전히 멎었다. 집 지붕에도 눈이 잔뜩 쌓여서, 내가 밖에서 주위를 구경하고 있을 동안 샘과 피에, 흄은 지붕으로 올라가, 눈을 치운다고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나중에 해도 되지않아?" 너무나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소리쳐 물으니 샘은, "이대로 놔 두면, 지붕이 눈의 무게에 못 이겨 무너질 수도 있어요, 도련님!" 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지붕은 경사가 꽤 있어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들은 지붕 한 복판에서 삽 같은 걸로 눈을 밀기만 했기 때문에- 그러면 눈이 스르륵 한 꺼번에 미끄러져 땅으로 떨어진다 - 떨어질 염려는 없는 것 같았다. 눈이 온 김에 눈사람이나 만들까? 그 때 블레탈이 마구간으로 가는 게 보였다. 그래. 할 일이 있었지. "블레탈!" 마구간으로 따라가자, 블레탈이 등을 돌려 나를 본다. "나 좀 태워줘." 간만에 온 왕도는 온통 눈을 치우려 애쓰는 사람들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아침에 샘과 흄, 피에가 하는 것 처럼 지붕에서 눈을 떨어트리는 사람들과 집이나 가게 앞의 눈을 한 곳으로 쌓아두는 사람. 그리고 눈을 통에 담아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눈만 돌리면 보인다. 나와 블레탈은 그들 사이를 지나쳐 우선 옷가게부터 들렸다. 맞춰 두었던 옷을 입고 가게를 나서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좌우로 비켜선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어리둥절해서 보고만 있는데, 블레탈이 날 잡아끌었다. "귀족들입니다." 귀족? 과연 블레탈의 말대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마차와 그 옆으로 말을 탄 남자들이 오고 있었다. 긴 장검을 허리춤에 찬 것을 보니, 호위인 모양이다. 저 칼로, 진짜 사람을 죽이는 걸까. 그 때 갑자기 마차가 멈춰섰다. 마차 뒤에 매달려 있던 한 소년이 풀쩍 뛰어내리더니, 날새게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차 안에서 굉장히 아름다운 소녀가 사뿐히 한 호위의 부축을 받아 내렸다. 호수같은 푸른 눈동자에 장미빛 뺨이 싱그럽다. 그 위로 흘러내린 눈부신 금발. 아름답긴 하지만, 나보다 높은 지위의 인간이라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않다. 적응해야 할 현실이지만, 이해할 수 없으니까. 감도 잡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블레탈과 함께, 다른 곳으로 서둘러 가려고 했다. 옷가게 여주인이 갑자기 가게 밖으로 튀어나오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리 되었을 것이다. "라인님! 이 옷 안들고 가셨어요! ...어마! 에스트라님!" 못난 여주인 같으니! 덕분에 에스트라님인가 하는 귀족소녀는 물론, 곁에있던 호위들까지 날 쳐다보게 만들었다. 별 수 없이, 속으로 욕을 하며 여주인에게 다가가 옷을 빼앗듯 들었다. 그리고 빨리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금발의 귀족소녀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면서 내게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안녕하세요, 이름모를 분. 전 코텔 가문의 에스트라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왼손을 내민다. 별 수 없이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하자, 그녀가 방긋 웃는다. "캐롤 라인입니다." "중인인가 보죠? 저어... 그런데 저 분은 친구이신가요?" 블레탈에게 관심이 있는건가? 하긴. 저 외모에 여심이 동하지 않는 게 이상한지도. "아닙니다. 제 노예지요." 갑자기 소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진다. "노예라고요?" "예." "그런... 말도 안되는..." 뭐가 그렇게 충격적이라는 거야? 사람을 앞에 두고 저런 시선이라니... 노예란 게 뭐가 그리 나쁘다고. 관심이 가면 그저 만나면 되는 것 아닌가? 신경이 쓰여서 블레탈을 보니, 평소와 다름없는 차가운 표정이다. 이 세계의 노예들이 당연히 받는 대우인지는 몰라도, 블레탈도 인간인데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잖아.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잠시만요." 그녀가 부르는 바람에 난 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짜증이 나지만, 어쩌랴. 왕족 다음으로 높은 계급이라는데, 나보다 높다는데. 웃기지도 않지만. 게다가 사람을 불러 세워놓고 한다는 소리가 이딴거다. "저 노예를 제게 파세요." 이 세계 사람은 어찌된 판인지! 같은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걸, 왜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거지? 내가 팔 것이라는 말을 안 했는데도 이제는 아예, 주머니에서 커다란 보석들을 꺼내며 '얼마면 되죠?' 하고 묻는다. 난 냉랭하게 대답했다. "팔지 않습니다." "왜요? 이걸로도 모자란가요? 그렇다면 본가의 하인을 시켜..." "돈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녀. 난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블레탈과 함께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블레탈이 질문을 했다. "왜 저를 팔지 않으셨습니까." "넌 물건이 아니니까." 슬쩍 올려다보니, 아까 전의 귀족소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문득 드는 장난기에, 싱긋 웃었다. "나같은 남자가 아닌, 그 미소녀를 주인으로 삼고 싶었어?" "절대 아닙니다." 저렇게 진지하게 부정하면, 내가 도리어 곤란하잖아. 별 수 없이 어색한 농담은 집어치우고,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난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물건 취급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세계는 모든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모든 인간은 존경받아야 될 생명체니까, 감히 어느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함부로 물건취급하며 구속할 수는 없다고. " "잘은 모르지만, 제가 알던 교리와는 틀린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이 곳에서 이상한 거니까. 하지만 적어도 난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을 물건으로 여기지 않아. 나에게 있어서 너나 샘, 피에, 흄은 하나의 인간이란 말이지." 블레탈과 함께,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사방이 온통 무기다. 정말 굉장하군. 한 곳으로 가서 조심스레 칼 손잡이를 잡아보니 느낌이 이상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라인님, 왜 이런 곳에..." "블레탈, 원하는 무기가 있으면 골라서 네가 쓰도록 해." "예?" "싸움을 좀 했다고 했었잖아. 그러니 앞으로 널 괴롭히는 인간이 있으면, 그걸로 널 지켜. 마음의 상처든 몸의 상처든 말이야." 아까 전의 그런 소녀나 노예상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을까. 마치 블레탈에게서 누나를 보는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그래. 사실 내 본심은 그거다. 블레탈은 아름다운 눈으로 날 가만히 보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절 지키기 전에 라인님을 지키겠습니다." 창문틀 사이로 스며드는 빛에 블레탈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잠시 멍하니 눈동자를 깜빡이던 블레탈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여니 훅 하고 밀려오는 시린 바람과 햇살. 그리고 약간의 뭐랄까... 이상한 기분. 언제나 사방이 꽉 막힌 곳에서 지내왔던 자신이다. 주변은 언제나 노예들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두웠으며 음침했다. 웃음과 조롱과 윽박과 갖은 거친 말과 야한 이야기들이 귀를 어지럽혔다. "으음... 벌써 일어난거요?" 찬 바람 탓에 잠에서 깨어버린 샘노인의 물음에, 블레탈은 아무말도 없이 창 밖만 바라보았다. 그런 블레탈의 옆으로 샘노인이 느릿하게 다가와서 섰다. 그리고 창 밖을 보며 감탄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 아니요?" "....." 끝도 없이 펼쳐진 눈밭과 푸른 침엽수들. 그 위로 이어진 새파란 하늘이 붉은 빛에 깨어나고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숲의 모습은, 너무나 고요하고 외롭기까지 했다. '외롭다라... 역시 이상해.' "사실 내 생전에 이런 광경을 보리라 생각도 못 했소. 우리같은 천한 것들은 평생 주인의 집 밖에 함부로 못 나가니까, 당연한 것이지만 말이오. 뭐, 영주님들께 매여있는 땅노예들은 아니겠지만." "....." "이번 주인을 잘 만난 것 같소. 자바에게 감사하고 싶을 정도요. 여태껏 중인 주인님들을 많이 섬겨봤지만 이런 분은 처음이라... 허허. 아니 내가 만났던 주인들이 이상한지도 모르겠군." 아니. 라인님이 이상한 거다. 블레탈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 굉장히 좋은 가문의 도련님이 분명한데도, 이런 외진 숲에서 자신을 포함한 노예 몇 만을 거느린 채 살아가는 것도. 한 번씩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이나 읽는 책들을 보면 잘 교육받은 지식인인 게 분명한데도, 그림만 그리는 것도. 전부 의문투성이다. 사실 자신이 라인님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노예가 주인의 사사로운 사정까지 알아서 뭐하겠는가. 그저 라인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될 뿐. 하지만 신경쓰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라인이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되자 블레탈은 몸을 씻고 식당으로 갔다. 자신이 말했던 게 역시 효과가 있었는지, 이제 식당에는 내내 블레튜고의 강한 향이 퍼져있다. 그리고 은은한 훼시아 꽃 향기또한. "블레탈." "...좋은 아침입니다. 라인님." 블레탈의 기척을 알아 챈 듯 라인이 등을 돌렸다. 여느 때와 같이 창백한 얼굴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새까만 눈동자. 주위를 감고 있는 조용하고 안정된 분위기. "스프랑 빵을 다른 사람들에게 갖다줘." 조용한 목소리에 블레탈은 라인의 옆으로 가서 스프를 받아들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하급노예들에게 이런 수고를 하지 않겠지만 라인님의 명이라면 들어야 한다. 블레탈은 스프와 빵을, 어느새 거실에 모여있는 샘과 피에, 흄에게 대충 건네주었다. 식당으로 돌아오니, 가지런히 음식이 차려져 있다. 라인앞에 마주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화끈 거리는 터무니없이 매운 스프도 이제는 익숙하다. 그래도 잠시 얼얼해지는 목구멍을 식히며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는 라인을 바라보았다. 요리 솜씨는 정말 최악이지만, 노예에게 직접 요리를 해 주는 중인은 아마 라인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노예일 뿐인 자신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행동들. 자신에게 드디어 주인이 반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지만, 하급 노예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몇 일 전의 그 말. '난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물건 취급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세계는 모든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모든 인간은 존경받아야 될 생명체니까, 감히 어느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함부로 물건취급하며 구속할 수는 없다고. ' 이해 할 수 없다. 고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은 정해진 것이다. 일반 노예들과 달리 배운 게 많은 블레탈은 알고 있었다. 고귀한 사람이 위에 있어야 한다는 걸. 그게 법칙이라는 것을. 만약 왕의 자리에 천한 노예가 앉는다면, 나라가 엉망이 될 수 밖에 없다. 노예는 아는 것도 없고 배짱도 없다. 허나 고귀한 사람들은 아는 것도 많고 넓게 생각하려 한다. 아무리 멍청한 귀족이 있어도 그에겐 위엄이 있다. 그건 타고난 것이다. 마치 라인님 처럼. 하지만 나쁘지 않다. 블레탈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듯 자신을 계속 위해 주는 주인은 처음이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소년은 처음이니까. 사실 라인보다 아름다운 주인들을 많이 섬겼던 블레탈이지만, 왠지 라인은 틀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이긴 했지만, 자신을 지키기 전에 라인을 지키겠다는 블레탈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불청객이 갑자기 들이닥친 건 아침의 일이었다. 흄이 허겁지겁 내 방문을 두드리며 주인님을 외쳐대서 내려가보니, 문 앞에 사람들이 잔뜩 서 있는 게 아닌가. 옷매무새를 대충 고치며 현관으로 갔다. "무슨 일입니까?" 이런 외진 곳에 사람들이 몰려오다니. 내 물음에 맨 앞에 서 있던 화려한 코트를 입은 소녀가 싱그럽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을텐데요, 캐롤 라인." 붉은 장갑을 낀 작은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를 했다. 모자 밑으로 흘러내린 금발과 생기 넘치는 커다란 파란 눈동자를 보니 누군지 알 것 같다. 며칠 전에 블레탈을 팔라고 했던 귀족소녀. "다시 말하는 거지만, 전 코텔의 에스트라에요."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약간은 화도 나서 퉁명스레 말해버렸다. 그 여주인. 남의 집을 함부로 가르쳐 주다니. 물론 귀족이 묻는다면 평민이 가르쳐 줄 수 밖에 없는 거겠지만. 에스트라는 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숙녀를 계속 밖에 세워 둘 참이에요?'란 말을 했고, 난 별 수 없이 그녀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녀를 따라 날카로운 인상의 검을 찬 남자 둘도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그렇다 치고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내버려 둬요. 저 사람들은 워낙 튼튼하거든요." 별 수 없이 밖에 있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에스트라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집도 좁은데다 저 사람들의 아가씨가 이렇게 말하는 데 내가 상관할 필요는 없겠지. 에스트라가 내가 빼어 준 의자에 앉아 이 곳 저 곳을 두리번 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해오라는 동물의 젖을 담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렸다. - 난 편의상 우유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는 그냥 마시는 것 같지만 워낙 비린내가 많이 나서, 이런 식으로 끓이고 있다. 우유가 적당히 데워졌을 쯤, 우유를 컵에 따르고 그 안에 꿀을 한 스푼 넣었다. 휘휘 젓은 뒤 거기에 말린 열매 가루를 조금 넣었다. 그러자 금방 우유가 마치 딸기우유처럼 변했다. 여자애니까 빨간색을 좋아하겠지. 불청객이지만 어쨌든 손님이니까. 빨간 우유는 에스트라에게 주고, 나머지 두 잔은 눈빛 살벌한 검사 두 명에게 건넸다. 상당히 추웠던 모양인지 따뜻한 잔을 건네자 마자, 마시기 보다는 컵을 만지며 시린 손을 녹이느라 정신이 없다. 내 몫의 것도 만들어서 에스트라의 맞은 편에 앉자, 에스트라가 냉큼 물어왔다. "이거 무슨 차죠? 예쁘긴 하지만 이 빨간색은... 피를 넣은 건가요?" 음식에 피를 넣다니. 어이가 없군. 농담일까? 하지만 잔뜩 진지한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러고는 하는 소리가 '저는 피를 좋아하지 않아요.' 여기서는 피도 마시는 건가. "저는 피를 음식에 넣을 정도로 비위가 좋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건 왜 빨갛죠?" "비밀입니다. 이상한 걸 넣지는 않았으니까 안심하세요." "하지만..." "맛은 옆의 두 검사분들 것과 같습니다. 원래는 같은 차인데 예쁜 걸 좋아하실 것 같아서, 분홍색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검사들은 한 번 마셔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입에 대고 있다. 당연하겠지. 여기 와 보니 온통 술 아니면 쓴 차만 마시는 것 같았으니까. 아니면 비린내 나는, 동물의 젖 같은 것. 내 말에 얼굴이 환해진 에스트라는 옆의 두 사람을 보더니, 이내 꿀물 탄 우유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조금은 꺼리끼는 것 같다가 이내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눈이 동그래진다. 그리고는 입에서 땔 생각을 않는다. 나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란 것 때문에 짜증이 나긴 하지만...여느 여자애들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우아하게 컵을 내려놓긴 했지만, 아쉬운 듯 자꾸 컵안을 힐끔거린다. "이 차 이름이 뭐죠? 주방장은 이런 맛있는 차를 여태껏 내놓지도 않았다니. 집으로 돌아가서 단단히 따져야겠어요." "제 특제 차니까, 요리사도 모를 겁니다." "어머. 그렇다면 이 차를 직접 만드셨다는 거에요?" "예. 재료비도 만만치 않지요." 아무래도 이 곳이 가장 추운 나라라서 그런 걸까. 꿀과 설탕, 열매같은 것들이 매우 귀한 것이라 이걸 살 때도 돈을 상당히 주고 샀다. 특히 꿀은 만드는 방법이 어려워선지, 날씨가 따뜻한 나라에서도 상당히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고 들었으니까. "헌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진지하게 묻자, 그제야 에스트라는 차 얘기를 그만하고 본 론으로 들어갔다. "전의 그 노예를 파세요." 그녀의 옆에 있던 검사 하나가 묵직한 자루를 풀러 식탁위에 올린다. 역시 예상했던 데로인가. 에스트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에는 전보다 많은 액수에요. 돈이 아닌 금이나 보석을 원한다면 그걸로도 드릴 수 있어요." "아니요. 팔지 않습니다." 딱 잘라 말하니, 에스트라의 눈꼬리가 사정없이 올라간다. "얼마나 더 돈을 달라는 거예요?" "그 말이 아닙니다." "그럼 뭐죠?" 사람은 물건이 아니니까. 돈으로 사고 파는 존재가 아니니까. 당신들은 그렇게 살아도 난 그렇게 살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내가 가진 이런 당연한 생각들이, 이곳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고 있으니까. 아마 말하고 나면 난 사상범으로 몰릴지도 모른다. "제가 아끼는 노예니까요. 가족과 다름이 없지요." "가족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노예가 무슨 가족이에 요?" 이 정도 말에 따라오는 비웃음. 옆의 두 검사도 왠지 어이없다는 기색이다. 예상했지만 씁쓸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별 수 없이 내키지 않는 예를 들기로 했다. "아끼는 하녀나 하인이 있으시죠?" "있긴 하지만...그건 왜요?" "그것과 같습니다. 에스트라 양께 그 사람들이 소중하듯이, 제게 그 노예도 그런 존재죠." "노예랑 평민을 어떻게 비교해요?" 확연히 드러나는 차별의식. 높은 계급의 사람일수록 이런 생각들이 단단히 박혀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결국 이 말까지 해야 하는 건가. "평민이랑 노예랑 뭐가 틀립니까.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인데요." "하긴..." 그 때 에스트라의 얼굴이 순간 발그레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서서는 문쪽으로 간다. 등을 돌리니 블레탈이 어느새 서서 날 바라보고 있다. 얼굴에 감도는 차가운 표정. "전에도 본 적이 있지? 너 이름이 뭐야?" "블레탈이라고 합니다." 언제 와 있었던 거지? 내가 하는 말들을 얼마만큼 들은 걸까. 혹시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잔뜩 신이 난 에스트라의 물음에 조용히 답하는 블레탈을 보며,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내가 한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는 거니까. 에스트라는 다행히 블레탈에게 자신의 노예가 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에스트라는 옆의 두 검사가 시간이 되었다면서 재촉을 하자, 그제야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블레탈과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잘 있어요. 다음에 또 놀러올께요." "안녕히 가십시요." 그리고 부디 영원히 가시길. 에스트라가 탄 마차가 말탄 호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뒷모습을 보다가, 옆에 서 있는 블레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느 때와 같이 아름답고 서늘한 얼굴이지만... 왠지 보통때와는 다른, 굉장히 차가운 분위기. "내가 한 이야기를 들은거야?" 블레탈은 답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들은 거야. "거짓말이야. 넌 하녀나 하인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믿지 않는걸까. 블레탈은 할 일이 있다며 집 밖으로 나가버리고, 난 우두커니 블레탈의 뒷모습만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어지럽다. 12. "추우니까 옆으로 와." "괜찮습니다." 계속 이런 식이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리고 있던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특별히 나에게 화를 내거나 쌀쌀맞게 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 이후에 내게 거리를 둔다. 마치 블레탈이 처음 내 집에 왔을 때 처럼.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은 따뜻하기만 한데, 왜 이렇게 가슴은 차가운지. 몇 번씩이나 오해라고 말을 해도 믿지 않았던 블레탈을 알기에, 뭐라 더 이상 말할 수도 없다. 널 그 귀족소녀에게 팔 수 없어서 거짓말을 한 거야. 나라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 줄 알아? 그런 역겨운 말을? 애써 신경을 그림으로 돌리려고 해도, 싸늘한 블레탈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 헛손질만 했다. 결국 연필을 놓고 블레탈을 휙 돌아보았다. "이제 화 좀 풀어." "화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주제넘은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이제 무례한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주인님의 말씀은 그른 게 없습니다." "블레탈." "저는 주인님의 노예입니다. 다른 하인들과 틀릴 게 없는. 잠시 제가 본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숨이 턱 막힌다. 이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는 것인가. 하긴, 앞에서는 '널 물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같다' 라고 말한 주제에, 뒤에서는 하인이니, 노예와 평민은 다를 바 없다느니 하는 걸 봤으니. 날 멀리하는 게 당연하다. 아무리 그게 본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블레탈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피에가 어느새 나타나, 주뼛거리며 눈치를 보는 것을 알아챘다. 피에의 인사를 받는 사이 블레탈은 거실에서 나가버리고, 피에는 블레탈이 두고 간 불쏘시개를 쥔 채 내 눈치를 살폈다. "신경쓰지 말고 일해." "예." 그제야 허겁지겁 장작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제 블레탈도 저 피에처럼 날 대하는 걸까. 그래. 이 세계에서는 이게 당연한거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노예가 무슨 가족이에요?' '제가 본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귀족소녀의 비웃음과 블레탈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뱅글뱅글 채운다. 결국 이렇게 상처받을 짓을 왜 한 걸까. 애초에 내가 그런 생각들을 입밖에 내지만 않았어도 블레탈이 날 오해할 리는 없었을 텐데. 아니, 어쩌면 오해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블레탈은 그게 당연한 말이라 했으니까.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겠다고 말했으니까. 내가 블레탈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며, 자유롭게 생각하기를 원했던 것 자체가 억지였을지도 모른다. "피에." "예?" "난 잘 테니까 불 잘 지켜." 화판과 연필을 들고 자리를 떴다. 그림을 더 이상 그릴 기분도 아닐 뿐더러, 내가 있으면 불편할 테니까. 이층의 난간에서 잠시 아래를 보니, 역시나 피에가 벽난로 쪽으로 자리를 옳긴다. 내가 만약 저 곳에 계속 있었다면, 벽난로 멀리서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겠지. 씁쓸한 마음에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털석 앉았다. 그래. 이제부터는 이런 멍청한 짓은 하지말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가슴에 묻어두자.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세상은 날 비웃기만 할 테니까. 결국 나만 상처받을 테니까. 그 이후로 사흘간 또다시 눈이 내렸다. 심한 바람까지 몰아치는 끔찍할 정도의 날씨에 난 하루 종일 두꺼운 모포를 몸에 두르고 있어야했다. 그래도 난 그 이후 절대 벽난로가에 가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서 쉬면, 다른 사람들은 벽난로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난 그들의 주인이니까. 음식도 알아서 만들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음식을 그다지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거실에 앉아서 밥 먹는 꼴은 더 이상 못 보겠으니까. 음식은 내 방으로 가져오라고 시키고, 난 하루 종일 내 방에 틀어박혀 독서와 그림그리기로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눈이 멎은지 이틀 째 되는 낮. 귀족소녀 에스트라가 또다시 찾아왔다. "또 놀러왔어요. 기별도 없이 온 건 무례한 일이지만, 이 먼 곳까지 기별을 넣기엔 무리라는 것. 캐롤라인도 잘 알죠?" "...어서 오십시요. 그런데 그 뒤의 짐들은 뭡니까?" 상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식료품같은 것을 배달하러 오는 일 외에 저렇게 큰 수레는 본 적이 없다. 푹신하게 보이는 하얀 모피 망토로 한껏 아름다운 에스트라는, 생긋 웃더니 남자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짐수레에 타고있던 남자들이, 짐을 가지고 내 집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대체 뭡니까!"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어요. 제 선물이니까 받아두세요." "선물...?" 생일도 아닌데 무슨? 아니면 오늘이 이 나라의 기념일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에스트라와 나는 친한 사이도 아닌데 선물이라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에스트라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떠오른 약간의 홍조와, 여기 저기 무엇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시선. "블레탈은 어디 있나요?" 역시. 짜증이 나서 에스트라를 째려보자, 그녀의 옆에 있던 두 검사가 날 무섭게 노려본다. 난 아랑곳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블레탈을 팔 수는 없다고." "걱정마세요. 오늘은 그냥 놀러온 것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이 금방 뾰로통해지는 걸 보니, 블레탈을 팔라고 말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머리가 아파지는 듯한 느낌을 참으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짐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공짜로 받는 물건이라지만, 저것을 빌미로 블레탈을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귀족의 호의를 거절하기엔 위험이 크다. 그 때 에스트라의 얼굴이 별안간 환해졌다. "블레탈!" 나비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블레탈에게 뛰어가는 에스트라. 거의 일주일 만에 본 블레탈은 전과 다를 바 없어보인다. 차가운 눈동자 화려하고 무표정한 얼굴. 지금도 내가 싫겠지. 블레탈과 에스트라가 뭔가 이야기하는것을 보다가 등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샘과 피에 흄은, 에스트라의 하인들에게 잔뜩 기가 질려 멀뚱히 그들이 하는 양만 보고 있고, 하인들은 척척 물건들을 알아서 정리해 두고 있었다. 옷들은 거의 블레탈의 옷장으로 다 들어갔고, 갖은 식재료들은 주방의 찬장으로 들어갔다. 선물이라기에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거의 정리가 다 되어갈 쯤, 그제야 에스트라가 블레탈의 팔짱을 끼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선물이 어떤가요?" "감사합니다." 블레탈에게 주는 옷들은 둘째치고, 왜 하필 식료품들을 잔뜩 선물로 주는지는 이해가 안 가지만. 하지만 그 의문도 곧 풀렸다. 에스트라가 블레탈과 두 검사를 끌고 식당의 식탁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내가 어이없이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을 빛낸다. "안 줘요?" "뭘 말입니까?" "손님이 왔으면 차를 내놓아야죠." 아아. 그래서 그렇게 잔뜩 식료품들을 선물이라고 준 거로군. 할 수 없이 우유를 중탕시켜서 끓이고, 찻잔을 꺼내 준비하고 있는데 블레탈과 에스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일할 게 있어서 일어나겠습니다." "일? 그런건 내 하인이 알아서 할 꺼야. 앉아있어." "제가 아가씨와 주인님과 같이 앉아 차를 마실 수는 없습니다." "걱정마. 내가 된다고 하면 되는거야. 캐롤라인도 이해해 줄걸?" 물론 같이 차 마시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네가 거슬려. 대체 자신 때문에 블레탈과 내 사이가 틀어진 것을 아는건지. 하긴 이제와서 그런 걸 생각해봤자다. 결국은 나 때문이니까. 내 생각을 함부로 입에 담은 내 잘못. 전과 달리 우유에 꿀만 타서 주니까 에스트라가 불만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왜 안 빨갛죠?" "빨간 걸 싫어하지 않습니까." "아뇨. 빨간 게 좋아요. 빨갛게 해 줘요." 귀엽게 부탁하는 에스트라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빨갛게 하는 재료가 없습니다." "제가 가져다 둔 식료품은요? 차에 쓰이는 재료를 다 가져왔는데?" "안타깝게도 제가 만드는 차에 쓰이는 재료는 없더군요." "그래요? 집에 돌아가서 단단히 혼내줘야겠어요. 엉터리 주방장 같으니." 주방장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별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자리에 앉아 차만 들이켰다. 사실 에스트라가 선물로 갖다 둔 식료품 중에 빨간 말린 열매가 있었지만, 신경 써서 차를 타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 속을 이렇게 뒤집어 놓은 귀족여자애에게. 아무리 귀여운 여자애라지만. 차를 마시다가 블레탈을 바라보았다. 블레탈은 옆에서 이것저것 말을 붙이는 에스트라에게 간간히 답하며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처음 마시는 걸 텐데 입맛에 맞을까.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블레탈은 예의 아름다운 보랏빛 눈으로 날 바라본다. 여전히 싸늘한. 우리는 잠시 불편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헌데 이번에는 무슨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물으니 그제야 에스트라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말했잖아요. 그냥 놀러..." "절도와 예법을 아는 귀족이신 에스트라양께서, 단순히 놀려고 이곳에 오신 게 아닌 줄 압니다. 또한 노예를 사러 온 것도 아니시니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이렇듯 선물까지 주시며 부탁하실 정도니 안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 그건..." 잔뜩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에스트라. 일은 무슨. 블레탈을 물건처럼 사려고 왔다가, 자존심에 그냥 놀러왔다고 한 걸 알고 있는 나다. 겉으로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뭔가 변명거리를 생각해느라 정신이 없는 에스트라를 유유히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로 놀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겠지요?" 원래 대충 짐작했던 사실이라도, 남이 말하면 상황이 틀려진다. 내 말의 '논다'라는 뜻을 깨닫지 못할 이는 없을 것이다. 노예인 블레탈에게 추근 거리기 위해서라는 뜻. 그 증거로 에스트라의 호위검사가 에스트라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자신의 아가씨라지만, 이렇듯 철없이 구는 걸 보고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 특히 그 부모라면 더더욱. 아무리 생각해도 저 두 사람은 에스트라의 부모가 호위로 붙여둔 사람인 것 같으니까. "아녜요! 에...제가 온 것은..." "예. 말씀하십시요." 무표정하게 에스트라를 바라보았다. 당황했는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힐끔힐끔 호위의 눈치를 본다. 집에가서 혼나지 않으려면 어서 변명하는 게 좋아. "초대하려고요." "초대요?" "친구들이 모여서 여는 파티에 와달라구요." "하지만 에스트라양의 친구라면 귀족영애들이 아닙니까? 제가 가기엔 무리..." "아뇨!" "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스트라를 보니 잔뜩 울쌍이다. 그러게 변명을 잘 할 것이지. 한참을 뜸을 들이던 에스트라는 그제야 변명거리가 생겼는지 입을 열었다. "친구의 오빠가 여는 모임에 오라구요. 캐롤라인은 이 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죠? 또래의 청년 귀족들과도 안면을 익혀야 되잖아요? 그래서 초대하려고 오늘 온 거예요." "물론 귀족분들과 알게 된다면 좋긴 하겠지만..." 낭패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심술을 부린건데, 이렇게 되다니. 나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 그것도 내 또래의 남자애들이 득시글한 모임에 가서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것처럼 끔찍한 것은 없으니까. "걱정말아요. 물론 젊은 귀족 남성분들의 모임이긴 하지만, 당신이 낀다고 해서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맛있는 차를 대접한 보답으로 부탁한 거니까 거절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린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거 잖아요?" 그러면서 낭패한 표정은 지워버리고, 생글생글 웃는다. 젠장. 이렇게 말하면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짜증만 일으키는 여자애다. 어쨌든 내가 부린 심술의 효과가 상당히 큰지, 에스트라는 눈치를 주는 호위와 함께 얼른 내 집을 떠났다. 그리고 몇 일 후, 또다시 에스트라가 찾아왔다.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는 그녀의 방문이지만, 이번에는 낯선 남자 하나를 데려왔다는게 틀리달까. 에스트라를 닮은 화려한 금발에 짙푸른 눈동자로 봐서 그녀의 친척이나 오빠가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그래서 그런지 에스트라는 평소와는 달리 블레탈의 '블'자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아마 눈치가 보이는 것이겠지. 에스트라의 사촌오빠라고 자신을 소개한 훼아라스는, 밝고 예의가 바른 영국신사같은 남자였다.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반갑다고 인사하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일일 것이다. 단지 내가 그에게 허리를 숙여야 했을 때 짜증이 난 것만 아니었다면, 마주 웃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뒤통수 두드리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가세." "예?" "모임에 가지 어딜 가겠나. 사실 이 곳에서 자네와, 내 어여쁜 사촌과 함께 티타임을 더 즐기고는 싶지만, 내 친우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오늘밤이 모임이었다니. 사촌오빠 앞이라고 조신하게 있는 에스트라를 슬쩍 노려보다가, 훼아라스의 재촉에 그의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고 마차에 올랐다. 그 와중 훼아라스가 모임날짜도 잊어먹고 있었냐고 핀잔을 한건 당연한 일이다. 대체 저 여자애는 초대의 기본도 모르는 걸까? 모임 날짜와 시간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가, 당일에 무작정 오다니. 원치 않았던 모임에 가는 것도 짜증나는데, 이렇게 되어버려 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다행히 중간에 에스트라가 마차에서 내려서 망정이지, 에스트라가 모임까지 따라 왔으면 내내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나와 훼아라스가 탄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갔다. 바퀴가 덜커덩거릴 때 마다 허리가 흔들려서 자세를 바로하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지만, 훼아라스는 귀족다운 점잖은 자세를 내내 유지했다. 그러면서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들. 이를테면 겨울철 사냥의 묘미라던지, 자신이 갔던 바르위셀이라는 나라의 사교계 분위기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난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간간히 질문만 던졌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오히려 반겨하는 기색이었는데, 천성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마차는 한 참 시간이 흘러섰을 때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밖에서 간간히 '코텔가의 마차다!' '훼아라스님이다!'등등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거의 다 도착한 듯 했다. 그렇지만 마차는 여전히 멈출 생각을 않았고, 난 짜증 반 의아함 반에 마차의 창을 열어 밖을 내다 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곱게 깎인 정원수들과 꽃들. 밤이라서 자세히는 볼 수 없어도, 달빛과 하인들이 든 횃불에 얼핏얼핏 보이는 정원의 규모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대체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도 분간이 가지않을 정도다. 이런 정원이 저택 안에 버티고 있으니, 대문에서 현관까지 가는 것도 꽤 시간이 걸리겠지. 신은 불공정하다. 누구는 끝도 없이 넓은 이런 곳에서 살고, 누구는 몸을 웅크리고 가축의 우리만도 못한 곳에서 살아야 하다니. 이 저택의 주인이 누리는 부만큼, 이 곳의 숱한 노예들과 평민들이 가난을 겪고 있을 것이다. 예전의 나와 누나처럼. "이제 곧 도착할 것이네. 너무 긴장하지는 말게나. 아무래도 새하얀 얼굴이 더 굳었군." 훼아라스가 싱글 웃으며 한 말에, 얼른 얼굴을 폈다. 그만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이 곳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생각들, 감정들. 이 사람은 내가 방금했던 생각을 알면 뭐라고 할까. 마차가 멈추어서자, 훼아라스와 함께 지긋한 마차안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로 확 밀려들었지만, 속에 있는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듯 해서 좋기만 했다. 그것도 곧 나타난 사람때문에 싹 가셔버렸지만. "대체 뭘 하다가 이제 나타나셨나, 그래?" "하하하! 오랜만이야, 친구!" 빈정거리는 투로. 하지만 잔뜩 반가운 기색을 얼굴에 띈 갈색머리 남자는, 환히 웃는 훼아라스와 가볍게 포옹을 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멀뚱히 서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훼아라스가 그에게 날 소개했다. "내가 말했던 소년이야. 여기는 내 친우인 다에론가의 파하스네." "반갑습니다. 캐롤라인이라고 합니다." "나도 반갑네! 에스트라가 그토록 말하던 소년이 자네였군. 혹시 왠 썩을 놈팽이가 양의 탈을 쓰고, 에스트라를 홀랑 넘어가게 한 건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닌 것 같아 다행이네. 에스트라가 남자친구는 참 잘 고른 것 같군." "남자친구라니요?" 이게 무슨 소리지? 대체 오해를 해도 그런 터무니없는! 파하스에게 아니라고 말하는데, 훼아라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다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말해도 되네." "예?" "사실 말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봐, 훼아라스.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그래. 우선 들어가세." 훼아라스와 파하스가 내 양 어깨를 잡고 저택안으로 인도했다. 저택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내부와 인사하는 하인들이 눈에 들어 왔지만, 자세히 볼틈도 없었다. 틈이 없었다기 보다는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게 더 옳을 것이다. 남자친구라니. 그것도 에스트라, 그 여자애의? 정말 웃긴 노릇이군. 이층으로 올라가 어느 방에 들어가자, 각색의 옷을 입은 청년들이 술을 마시며 각기 패거리지어 이야기를 나누거나 게임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인사하는 여러 청년들에게 대충 답하며 파하스와 훼아라스는 날 끌고 한 테이블로 갔다. "여, 훼아라스 왔군!" "오랜만이네 훼아라스!" "그런데 옆의 그 소년은 누구죠? 처음보는 얼굴인데?" 테이블에는 여러 소년과 청년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이 테이블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도 날 힐끔거리는 게 여간 신경쓰인다. 좋지만은 않은 시선들. 호기심? 혹은 경멸의? 내가 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거지? 소년의 물음에 파하스가 웃으며 말했다. "캐롤라인! 내가 초대한 중인소년이야." "초대한 중인...아하! 에스트라양의?" 그러면서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뭔가 단단히 꼬여도 꼬인 것 같다. 내게 반갑게 인사하는 귀족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그들이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오히려 그들의 친절이 가시방석같이 느껴졌지만. 그들이 에스트라 운운하며 저희 끼리 이야기 하는 것을 혼란스러운 심경으로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파하스에게 말을 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뺄 것 없어. 그래, 훼아라스. 자네와 이야기 해야지." 훼아라스가 내게 붉은 술이 담긴 잔을 건내며 말했다. "파하스의 말대로 자네와 에스트라가 연인이라는 것은 이미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네. 숨기지 말게." "다들...이라면?" "누구긴 누구겠나. 우리 또래의 귀족들이지." "예?" "사실 왕도가 넓어보이긴 해도 참 좁은 곳이지. 만사가 지루한 일 밖에 없는 우리들이니 만큼, 왠만한 일이 벌어지면 그게 이야깃 감이 되고는 한다네." "대체 무슨 말인지 도통..." 그렇다면 왕도에 있는 젊은 귀족들이 전부다, 나와 에스트라가 연인이라고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하고 있단 말인가? 난 그들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들은 전부 다 날 안다고? 그것도 에스트라의 남자친구로? 맙소사.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에 정신없이 독한 술을 들이켰다. 남의 구설수에 오르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나다. 학교에 다닐 때도 언제나 조용하게 살았던 내가, 이야깃거리로 오르고 있다니. 그것도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들의 재미를 위해. "에스트라가 자네 집을 찾기 위해서 하인상회를 들쑤셨다는 것을 아는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내 집으로 갑자기 찾아올 수 있었던 게... 옷 가게 여주인의 도움이 아니었단 말이었군. 그런데 들쑤셨다니. 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 뿐만이 아니네. 자기는 숨긴다고 숨기는 것 같았지만, 날씨가 조금 풀리는 날에 자네집으로 가는 것 하며... 사실 자네 집이 왕도와 가깝기는 해도 이런 추운 겨울에, 마차를 타고 그 먼 시간동안 왕도를 나가기는 어려운 일이지. 보통 이런 때에는, 날씨가 왠만큼 풀려도 남자들도 왠만해선 움직이지를 않잖나. 봄이 되면 모를까. 그래서 귀족들이 궁금해했던 모양이야. " "......" "게다가, 흠. 사실 여자가 남자집에 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데에 있지. 사실 신심이 깊지 않은 바에야 고리타분하게 순결을 고집하는 사람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그런 헛소문이 퍼진 거로군요." "헛소문? 헛소문이라니? 그렇다면 정말...." "예. 아닙니다. 그녀가 오면 언제나 차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한 것 밖에는..." "그렇다면 에스트라의 짝사랑이라는 거로군." 어느새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나와 훼아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그런 게 아니지만, 더 이상 부정할 힘도 없기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만 입에 대고 있으니, 파하스가 흥이 식은 얼굴로 입을 다시며 말했다. "에이. 간만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짝사랑이라니. 재미없군. 그냥 왠만하면 넘어가주는 게 어떤가?" "그래. 에스트라가 당신에게 엄청 공을 들이던데. 유명한 옷가게마다 가서, 남자 옷을 지어내라고 해서 소문이 자자하다구! 치수도 모르는 게 무작정 지어내라고 해서, 내가 아는 재단사들 마다 우는 얼굴이더라. " 그 옷은 내 옷이 아닌 블레탈의 옷이고, 내가 받은 건 식료품만 한가득이라고 말할래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에스트라의 감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깊다는 생각이 들어서기도 했다. 사실 놀랐다고나 할까. 블레탈을 팔라느니 하고, 갑자기 예의없이 찾아오고. 그녀의 머릿속에 박힌 신분에 대한 차별은 어쩔 수 없지만, 블레탈에 대한 마음이 그녀 나름대로는 정직한 게 아닐까. 마차를 타고 불쑥 불쑥 나타난 것 뒤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니. 어쨌든 블레탈에 대한 것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겠다. 귀족여자애가 한낱 노예에게 마음을 뺏긴것을 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아쉬워하는 귀족들과 소년의 말에 맞장구치며 웃는 파하스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위로 차가운 것이 쏟아졌다. "어째서 중인따위가 이런 곳에 있는거지?" "키에른! 이게 무슨 짓이야!" 눈 위로 흐른 것을 닦으니, 알싸한 술냄새가 손에 묻어온다. 내게 술을 끼얹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하자, 내게 술을 끼얹은 새끼의 것이 분명한 손이 내 머리채를 잡고 테이블에 쳐박았다. 머리가 순간 핑 돌았다. 엄청난 악력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놓지 못해!" "명령하지 말아. 그리고 네가 이번 모임의 주최자라도 말이야, 이런 구린내나는 놈을 우리들의 모임에 끼어들게 하다니 제정신인 건가? 중인들과 놀고 싶으면 놈들의 모임에나 가도록, 파하스 휘가 다에론." "좀 심한 것 아닌가, 키에른. 진정하게." "훼아라스. 이 정도면 많이 봐 준거라고 말하고 싶군." 날 이렇게 더러운 놈 취급하는 새끼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있다니. 내가 왜 이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누르는 놈의 악력에 이를 악물며 버티는데, 녀석이 내 귀에 입을 대고 말했다. "...더 이상 잡고 있다가는 내 손이 썩을 것 같군. 네 주제에 안 맞는 물에서 놀려다가,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녀석은 내 머리를 털듯이 떼어낸 후 가버리고, 난 어질한 머리를 겨우 일으켰다. 아까전까지 즐겁게 놀던 귀족들이 전부다 날 힐끔거리고 있었다. 걔중에는 날 비웃으며 보는 놈들도 있어서 머리가 아찔할 뿐이다. 부끄럽고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다. 하지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여기는 신분제니까. 간신히 이를 악물고 울분을 참고 있는데, 훼아라스가 괜찮냐고 물어왔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같이 노는 건 안되겠는 걸. 방에서 좀 쉬어." 테이블에 앉아있던 소년이 날 방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파하스는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가 버리고 훼아라스는 푹 쉬라고 한 뒤 다른 귀족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을 내버려둔 채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소년을 따라 방을 나오는데, 소년이 갑자기 내 손을 탁 놓으며 말했다. "너 진짜 등신 같다." 왜 이따위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입을 열면 폭발할 것 같아서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훼아라스랑 파하스 녀석이 잘 해줘서 좋지? 근데 어쩌냐. 다 똑같은데." "....." "너의 가치는 종 아니면 가지고 노는 인형이지. 뭐하러 여기 왔 냐? 중인은 중인끼리 놀아. 우리들이 노는 곳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나도 이 딴데 오고 싶진 않았어." "그럼 가." 그래. 간다. 이 따위 더러운 곳 따위! 바닥에 침을 퉤 뱉고, 신경질적으로 발을 옳겼다. 어떻게 집까지 걸어서 가는지는 내 알바 아니다. 무작정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가란다고 진짜로 가냐?" 소년이 뒤에서 비웃는 게 거슬렸지만 계단쪽으로 향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몸이 앞으로 휙 밀리는 게 아닌가. "헉!" 가파른 계단이 앞으로 확 밀려들었다. 구를거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뭔가가 내 팔을 잡아끌어 엉거주춤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욱신거리는 고통은 둘째 손 치더라도,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다. 순간 난 뭔가 떠오르는 것에 뒤를 흭 돌아보았다. "이자식!" "이제야 좀 재수있어 보이네." "너 때문에 떨어질 뻔 했잖아!" 떨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엉덩이가 욱씬거리는 것을 참으며 계단에서 일어서는데, 소년이 픽하고 웃으며 날 지나쳐 앞으로 갔다. 저 재수없는 새끼! 소년의 뒤통수만을 노려보고 있는데 계단을 다 내려간 소년이 내게 말했다. "빨리 안 내려오고 뭐해?" "뭐?" "두번 말해야 알아듣는 멍청이야? 아니면 그 정도에 거동도 못하는 약골인가?" 참자. 참아야 한다 이라인. 내가 계단을 내려갈 때 까지 지루하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던 소년은, 따라오라는 듯이 눈짓을 하더니 몸을 휙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별 수 없이 소년을 따라 현관쪽으로 향하자 지나가던 하인들이 인사를 해왔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소년에게. 소년은 하인들의 인사를 무심히 넘기며 날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옷을 비집고 스며드는 느낌에 몸이 떨린다. 소년은 하인들이 가져다준 말고삐를 쥐더니, 유연한 움직임으로 올라타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해, 안 타고?" "...제가 왜 당신 말을 타야합니까?" 화가 났지만 이미 머릿속이 냉정을 찾은 상태라, 내가 중인인 이상 이 소년에게 예우를 해야 한다는 것쯤은 깨닫고 있다. 정말 재수없는 시스템이군. 신분제란 건. "마차도 말도 없이 무슨 재주로 집까지 가겠단 거지?" 별 수 없이 그 손을 잡고 말 위에 오르자, 하인 하나가 등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왼손에 등을 쥐고 오른손으로 소년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자마자 소년은 가차 없이 말고삐를 내리쳤다. "이랴!" "히이잉!" 말은 재수없는 저택을 뒤로하고 땅을 박찼다. 소년이 말을 사정없이 몰아친 덕분인지, 들어올 때와는 달리 금방 정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볼이 얼얼하다. 온통 어둠이 내려앉아 등불과 달빛이 없었다면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적막속에, 같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재수없는 소년하나. 말 한마디 없이 소년은 말을 몰고, 난 그의 허리만을 잡았다. 어디쯤일까. 가늠할 수도 없을 때 별안간 소년이 입을 땠다. "분하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건가? "지방에 사는 귀족들은 그렇지 않지만, 왕도에 사는 녀석들은 얼간이가 많아서 말이지. 겉으로 좋게 대하든 나쁘게 대하든 중인이라면 부하 이상으로는 보지않아. 아아, 정확히는 부하후보, 좀 더 까발리면 부려먹기 좋은 놈들. 저속하게 말하면 종노릇 잘 하게 생긴 새끼들..." "....." 내 머리에 술을 끼얹고, 내 머리를 탁자에 박은 그 새끼와 훼아라스, 파하스. 그리고 에스트라가 차례대로 떠오른다. 훼아라스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살아온 세월동안 느낀 것은 사람이란 항상 의심하고 만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년의 말이 맞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 그런데 귀족이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지? "네가 귀족들의 모임에 초대된 이유가 뭔 줄 알아?" "...에스트라양이 부탁했기 때문이죠." "그거 말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할 텐데?" 단순히 내가 흥미거리라 부른 게 아니란 말인가? 내게 무엇을 얻을 게 있다고...얻을 것? "부...입니까." "빙고." 그래. 지금의 난 지구의 극빈층 이세인이 아니지. 엘위론이란 나라에 살고있는 중인계급 소년 캐롤 라인. 그게 나다. 산타는 이런 내게 집을 포함한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었고. 상회의 사람들이 식량과 필수품을 일주일에 한 번씩 날라올 때, 돈을 주려고 하니까 적금해 둔 돈의 이자로도 충분하다고 그들이 말했다. 그 때 상회에 맡겨두었다는 돈이 예금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이 때까지 푼돈밖에 만져본 적 없는 나이기에 집에 있는 돈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었다. 또 그 돈은 본래 내 돈이 아닌데다, 감당할 수 없는 돈은 일단 내버려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확인하지도 않았다. 멍청하군 이라인. 이 곳에 적응하겠다고 마음먹고서는 사실 적응한 게 하나도 없다니. 아직도 자신을 가난한 고등학생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건가? 윤락업소에서 일하는 누나와 함께, 공기도 빛도 통하지 않는 지하방에서 근근히 집세를 내며 살던 이라인이라고? 산타가 남겨준 재산은 분명히 상당한 것일 것이다. 소시민의 눈으로 봐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봐도 상당한 재산. 나중에 확인을 해봐야 겠지만 분명하다. 벌은 꿀을 가진 꽃에게는 날아들지만 꿀이 없다면 신경쓰지 않으니까. "돈이 많은 부하가 있으면 정말 편하지. 오늘 모임도 파하스가 주최이긴 하지만 그 뒷돈은 녀석의 부하가 댄 거라고. 평소에도 마찬가지야. 별다른 직업도 가지지 못하고, 그렇다고 돈을 딱히 벌 구석이 있다거나 정계에 진출하지도 않은 어린 귀족들 따위가... 대체 어디서 놀고 마실 돈을 얻겠어?" "주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을 게 아닙니까." "있지. 똑똑한 중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꽤찰 수 없는, 상급관직을 얻을 수 있는 귀족들이니까. 이리저리 도움을 준다고. 그래도 말이야. 어지간히 힘이 없으면 부려 먹히기만 하니까." 그런 거였나. 결국은 봉이란 말이군. 언제나 주위 친구들 혹은 급우들에게 없는 녀석 내지는 쫌생이로 취급받던 내가 봉이라니. 이상한 느낌에 피식피식 웃음이 튀어나온다.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빈티나는 몇몇 귀족 외에는 다들 배부르게 자라신 귀한 몸들이라서 그렇게 돈을 밝히지는 않아. 부하가 돈이 많으면 편하다 정도의 개념이지." "그렇다면 제게 또 다른 얻을 것이 있다는 겁니까?" "...장식품." 뭐? 순간 말이 히이잉 거리며 멈춰섰다. '이 녀석도 조금 쉬어야지'하고 소년은 말하고는, 내 쪽으로 힐끔 고개를 돌렸다. 내가 든 등불과 달빛에 소년의 갈색 눈동자가 마치 붉은 듯 광채를 띄고 가늘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을까. "넌 중인같지 않다고나 할까... 귀족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훼아라스와 파하스의 소개만 없었더라도 널 지방에서 온 귀족으로 다들 알았을거야. 세련된 행동이나 완벽한 엘위론어, 귀하게 보이는 외모. 무엇보다 절제된 태도. 넌 키에른 체라 카레스에게 모욕당할 때도 울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어. 분노한 기색은 담고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물러났지. 일반 중인들이라면 달랐을 텐데..." 그야 난 이 곳 사람들과 가치관이 틀리니까. 하지만 그걸 가지고 장식품이라니. 하긴 사람을 사고 파는데, 장식품이라고 못하겠냐마는. "좀 잘난 사람을 곁에 데리고 싶어하는 게 귀족들인데, 그 점에서 넌 상당한 점수를 땄다고나 할까. 돈도 많고 말이야? 키에른과 친한 놈들이나, 중인들을 벌레처럼 여기는 멍청한 놈들 빼면 다들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거야. 결국 그렇게 되면 네 위치는 정해지지. 부하와 친구의 중간." "그게 뭡니까." "말했잖아. 부려먹는 것도 부려먹힐 만한 사람일 때 부려먹는 맛이 나지, 너같이 기품과 절도가 철철 흘러넘치는 귀족같은 중인이라면 '이 녀석은 중인이다'라고 생각했다가도 나중에는 은연중에 잊어버리고 말 거라고. 사람의 마음은 쉽게 컨트롤 되는 게 아니니까. 뭐, 키에른같은 놈들은 제외하고. " 키에른... 생각하면 얼굴로 열이 몰린다. 창녀누나를 둔 거렁뱅이 고아새끼라고 놀림받던 때가 많은 나인 만큼, 이 정도의 수모에 쉽게 폭발하지는 않지만 녀석은 이미 내 적이다. 갚아주지 못한다면 다음부터는 날 함부로 할 수 없게는 만들어야 한다. 녀석이 내게 모욕조의 말을 듣고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상상. 생각만 해도 통쾌해진다. 귀족들을 방패막이로 한다면 나한테 함부로 못하겠지.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돈을 마구 퍼 줄 수는 없는데... 결국은 원점이군. 허탈감에 순간 힘이 쭈욱 빠진다. 있는 것이라고는 돈 밖에 없는데 그 돈도 산타가 준 것이니 온전한 내 능력이라고 할 수도 없다. 지구에서나 이곳에서나 능력없는 건 마찬가지인 것일까. 바보같군. "...당신은 귀족이면서도 왜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아까전부터 머리를 맴도는 질문을 하니 소년이 갑자기 비웃었다. "난 내가 귀족이라고 한 적 없는데?" 알고봤더니 소년은 제하 알레그로 라는 이름의 중인이었다. 녀석은 내 집이 아닌, 왕도에 있는 자신의 집 앞에 말을 멈추었다. 역시 이런 컴컴한 밤에 숲에 있는 내 집으로 가기엔 무리겠지. 녀석이 날 초대한 꼴이 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붉은 카펫을 밟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그다지 크지않은 서재겸 응접실이 나왔다. 천장에 달린 등 안에선 초 여러개가 불꽃을 흔들고,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른다. 창에는 커다란 붉은 커텐이 쳐져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 중간에 붉은 빛깔의 나무로 된 작고 둥근 탁자와 등이 휘어진 의자 두개가 놓여 있었는데, 내가 의자에 앉자 알레그로는 찬장에서 술병과 잔 두개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술병의 마개를 능숙한 솜씨로 뽑은 알레그로는 잔 두 개에 붉은 술을 따르며 내게 말했다. "백수생활은 청산하지 그래." 술을 입에 머금으니 입이 싸해지며 혀 끝에 단맛이 배여나온다. 잘은 모르겠지만 꽤 좋은 술인 것 같다. 지구에서는 소주밖에 마셔본 적이 없었는데. "그 넘쳐나는 돈이라면 백수로 평생을 살아도 되겠지만." 나도 뭔가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이곳의 어린 아이들보다 못한 지식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곳에서는 바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르겠지만, 나는 지구에서도 중위권 성적의 인문계 고등학교 일학년...즉 전문적인 지식이라고는 없는 어린애였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능력없는 건 마찬가지. "내가 돈이 많다는 건 어떻게 아는거지? 그리고 하는 일이 없다는 것도. " 알레그로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에스트라가 워낙 설쳤으니까. 넌 잘 모르겠지만, 네가 사는 그 집은 <호수의 하얀 벽돌집>이라고 제법 유명하지. 겨울과 가을만 아니라면 귀족들은 숲의 호수가에 자주 놀러가는데, 덕분에 네 집을 사고싶어 하는 귀족들이 한 둘이 아니야. 비싸서 문제지만." "비싸다니?" "왕도 밖 숲까지 집을 지을 자재와 인부들을 데려 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게다가 집을 지은 것 또한 귀한 흰 벽돌로 되어 있고. 부르는 게 값인 집이야. 그런 집에서 사는 널 찾는다고 에스트라가 설쳤으니... 그리고 뭔가 하는 게 있다면 왕도에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중인들 중 누구도 너랑 왕도에서 만난 일이 없었지. 그러니 백수라는 결론이 날 수 밖에. 좋게 말하면 별장에서 휴양을 즐기는 소년이겠지만, 그 덕에 중인들 여럿이 널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 둬. 게다가 왕도가까이에 살게 됐으면서 중인이 아닌 귀족들과 먼저 대면식을 했잖아?" 원하지도 않았는데 날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뒷골이 지끈지끈 쑤시는 것 같다. 그냥 집을 팔아버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거나... 아니면 이민을 가버릴까?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도 짜증날 판에, 그 사람들이 날 봉 혹은 돈 많아서 편하게 놀고먹는 놈 정도로 본다는 건... 황당하기 전에 끔찍하군. 어쩌면 키에른이 날 모욕한 것은 내가 이런 평판을 듣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놀고 먹는 놈이 같은 중인들에게는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다가, 자신이 있는 귀족모임에 불쑥 끼어들었으니. 뭐 같은 놈이 윗물에서 어울릴려고 난리치는 것으로 보일법도 해. 이런 것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아마 알레그로가 아니었으면 소위 상류사회란 곳에서 난, 둘도 없는 멍청한 놈이 되었을 테지. 이 녀석은 무슨 목적으로 내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는 걸까. 흔들리는 불빛밑에 붉게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유없는 도움이란 건 없는 법. 저 녀석의 시종일관 비웃는 태도도 이유없이 선의를 배푸는 자의 것이라고 보기엔 무리. 냉소적인 눈동자로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순간 알레그로가 눈을 마주쳐왔다. 냉랭한 얼굴위에 떠오른 옅은 비웃음. "걸리는 거라도 있는건가?" "아니." 술잔으로 눈을 돌렸다. 그 뒤로 우리는 말없이 술만 주고 받다가, 한병을 다 마시고 나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난 녀석이 내어준 빈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뻗어버렸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과 처음보는 어떤 방의 풍경이었다. 아니 여긴 알레그로가 빌려줬던 방이군. 아직 멍한 정신을 잡고 침대에서 일어나니, 고풍스럽고 화려하기만 한 붉은 빛의 방안이 눈에 들어온다. 이 방을 비롯해, 알레그로의 방들은 다 뭔가 어둡고 이상한 분위기였었는데.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말이야. 역시 낮과 밤의 차이일까. 어제 봤던 방안 모습도 이렇게 다르다니. 전등과 전구로 '어둠이 없는' 도시에 살고있는 지구인들은 이런 걸 짐작도 할 수 없을테지. 몇 달전의 나도 그랬는데. 기억을 더듬에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마치 지구로 돌아간 느낌이 영 낯설었지만, 곧 매우 기분이 좋아져서 물을 뿜는 샤워기를 내 몸 구석구석에 들이대며 비누칠을 했다. 내 집에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왕도의 집들은 다 수도시설이 되어있는 걸까. 하긴 왕도에 오면 보이는 게 하수구였으니. 옷을 입고 방 밖으로 나오자, 목까지 덮은 붉은 상의를 입은 알레그로가 뭔가를 만들고 있다. 녀석은 날 힐끔 보더니 '거기 앉아서 <알레 프레샹>이라도 보지 그래'하고는 계속 제 할일을 한다. "알레 프레샹?" 내 질문에 귀찮다는 듯 고갯짓만 하는 녀석. 식탁에 놓인 종이를 펼치니 맞게 찾은 것 같다. 보니까 주간으로 나오는 신문이었는데, 왕도안의 이야기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이동수단이라고는 말밖에 없고, 통신수단은 편지가 유일한 이곳에서 왕도 밖의 이야기까지 싣기는 무리겠지. 지구보다 못한 게 많지만 어쨌든 놀랐다고나 할까. 수도시설과 하수구뿐만이 아니라 신문까지 갖춰진 이곳은 생각보다 상당히 발달한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알레그로가 뜨거운 스프와 빵, 버터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끼어들어 음식을 식탁으로 날랐다. 나이프와 스푼도 올리고 대충 아침식사가 다 차려졌을 때, 알레그로가 술을 잔에 따랐다. 뭔지 대충 알 것 같다. '블레튜고 입니다. 몸에서 열을 나게 해서, 추위를 막습니다.' 담담하면서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었지. 블레탈은 다른 사람들과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외박한다는 말도 안 했는데. 아니지. 어차피 내가 없었던 게 편했을 런지도. "네 눈에는 안 차겠지만 이것도 꽤 고급이야. 그런 떫은 표정은 그만두지 그래?" 알레그로의 이죽거림이 있고 나서야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실례를 한 것 같아, 블레튜고부터 들이켰다. 독해서 목구멍이 화끈거렸지만 확실히 몸은 따뜻해지는 것 같아 참기로 했다. "난 나가봐야 하니까, 하인상회에 가서 집까지 마차를 태워달라고 해." "뭔가 하는 일이 있나보지?" "여러가지. 당장은 사학에 갈 시간이군." 사학이라면 사립학원을 말하는 거군. 학생이었나... 학원이라. 식사를 다 마치고 녀석과 나는 인사 한 마디 없이 헤어졌다. 알레그로는 말을 타고 가버리고, 난 알레그로의 조언대로 하인상회를 찾아갔다. 어차피 내 재산도 확인해야 되니까. 중심가에 위치한 하인상회 건물은 익히 알고있는 것이기에 찾기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번이 첫 방문이라는 것과, 들어가서 직원에게 내 이름을 말하자 마자 쏠리는 시선에 불쾌했다는 것 뿐. 직원은 날 이층의 어떤 방으로 안내했고, 들어서자마자 외알 안경을 낀 남자 하나가 웃으며 내게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이거 참 반갑습니다. 전 하인상회의 회계사무장인 조아라 머니입니다." "캐롤라인입니다." "헌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혹시 저희 상회가 추진하고 있는 일에 투자를 하신다던가..." "아니요. 하인상회가 관리하고 있는 제 재산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재산을요? 하긴 캐롤라인씨는 조부이신 캐롤 산타클로스의 재산을 물려 받은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남자는 안쪽 방으로 사라지더니 곧 책 한권을 들고 나왔다. 그는 책을 내게 건네주었고 난 그것에 내 이름이 적혀있는 걸 확인하고 넘겼다. 그리고 난 한참 그것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땔 수 있었다. "이거... 뭔가가 잘못 된 거 아닙니까?" 현실감이 나지 않는다. 짐작은 했고 산타 또한 내게 선물이니 어쩌며 재산을 맡겨 두었다고는 했지만. "아니요! 확실합니다. 양도를 할 때 조부이신 산타클로스씨와 직접 확인한 겁니다. 저희는 고객의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소시민인 나로써는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영영영영영이라니. -웃기게도 여기서도 아라비아 숫자를 쓴다.- 아직까지 이곳의 물가에 대해 개념이 없는 나로써는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 상상도 못할 만큼의 재산이라는 건 분명하다. 온통 어지러운 머리를 정상으로 돌리려고 노력해봐도 어제와 오늘, 갑자기 들이닥친 수많은 생각과 잡념들 때문에 힘들다. 내가 가진 부와 신분에 대한 실감과, 날 바라보는 귀족과 중인들의 시선. 왕도 가까이에 살면서 그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봐도 놀랄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나인데. 갑자기 덜컥 겁도난다. 혹시라도, 만일에. 이 돈을 얻으려고 누가 날 죽이거나 속일 생각이라도 한다면? 뉴스같은데 보면 나오던 게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갖은 범죄들 아니었나. 게다가 내 집은 왕도 밖에 있으니까 위험하다고, 여러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확인은...이제 되었습니다. 집으로 가야하니..." 말을 이르려는 순간 가슴이 꽉 막혔다. 집? 집이라고? 누나도 없고, 가면 답답하기만한 그 곳이 진정 내 집인가? 난 직원을 불러 뭐라 지시하려는 남자를 멈추고는, 내가 들어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집이 아닌. 어딘가 쉴 곳으로 가고싶습니다." 일단...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블레탈은 파르르 떨리는 눈썹을 들어 길 저편을 바라보았다. 긴 눈썹아래 자리잡은, 한숨이 나올만큼 아름다운 자수정빛 눈동자가 초조함으로 가차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한점의 미동도 없이 서서 아무도 없는 길을 내다볼 뿐이었다. 북국(北國) 엘위론의 겨울은 가혹하다. 할퀴는 듯 매서운 바람과 지독하게 굵은 눈이 내리기 일쑤고, 성질머리 사나운 얼음여신의 횡포에 겨울내내 눈이 녹지않을 도로 추위가 계속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위론의 겨울을 두려워했다. 아무리 두터운 옷으로 몸을 감싸도 심장을 위협하는 여신의 손톱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저체온증과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들이 허다한 계절이기에 겨울에는 다들 외출을 삼갔다. 블레탈이 그걸 모를리는 없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세번째 눈이 내리며 더 날씨가 추워졌기에, 사실 이런 곳에 계속 서 있다는 건 일종의 자살행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추위에 대한 공포는 카바예란일 때 매일 접해왔던 것이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가슴에서 치미는 초조함을 주체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몇 시간째 서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라인님이 모임에 간다고 집을 나선지 벌써 삼일째. 초조한 마음에 이곳까지 나와버리고 말았다. 주인의 허락없이 멋대로 집 주위를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저택에 있으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이곳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블레탈은 하얀 눈위에 순간 풀썩 앉았다. 그 바람에 긴 보랏빛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하얀 눈위에 흘러내렸다. 차가운 눈의 기운이 엉덩이로 타고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환상적인 보랏빛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눈을 감고 말았다. 머릿속에 쟁쟁히 스쳐지나가는 차가웠던 그 날의 기억. '아끼는 하녀나 하인이 있으시죠?' '있긴 하지만...그건 왜요?' '그것과 같습니다. 에스트라 양께 그 사람들이 소중하듯이, 제게 그 노예도 그런 존재죠.' 그 때 그 순간 치미는 것은 황당함과... 나중에는 분노였다. 자신은 '하인따위로서 아껴지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여겨질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라인님이 자신에게 대하는 말투, 옅은 미소, 태도. 전부 자신에게 단순히 '좋아함'이상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기에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무리 잘난 귀부인들도 곱고 요염한 노예들도 자신을 보면 헤어나오지 못했다. 고운 색을 갖춘 창녀인 어미보다는, 그녀를 한번 거쳐 갔었다는 이름 모를 아비를 닮은 자신의 인간같지 않은 외모에 사람들은 황홀해하거나 욕정을 품는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마음대로 휘둘러왔던 게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라인님은 틀렸다. 처음에 자신을 봤을 때도 본채 만채 하더니, 이제는 '하인으로서 아낀다' '가족 같은 존재다'라는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말만 하고 있었다. 이제 좀 있으면 그의 라인님을 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판단미스였던 것이다. "젠장." 순간 블레탈의 화려한 얼굴이 가차 없이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홧김에 화를 내고 나서 라인님과 사이가 영 틀어져버렸다. 참고 그에게 다가가려다가도 그가 하는 소리. 이를테면 '아직도 모르겠어? 넌 내 가족 같은...!'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평소 노예들에게나 드러내던 날카롭고 가차 없는 본인의 성격이 튀어나와 더 틀어져버리는 것이다. 자신도 이해가 안 가고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도 당황스럽지만, 이상하게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블레탈의 마음은 초조함으로 범벅이 되어 아무 일도 못할 정도로 가누기가 힘들었으니까. 라인님이 돌아오면 이번에야 말로 용서를 구하고 그와 예전처럼 돌아가기로 다짐했다. 라인님이 차가운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볼 때 마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것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라인님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이 있어서 늦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거나. 만일에라도 자신이 보기 싫어 그러는 거라면... '후. 아니지. 노예 때문에 자신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 주인은 없어.'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에 순간 매우 마음이 놓였지만 곧 드는 위험한 생각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혹시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그 때 땅에서 미세한 진동과 함께 멀리서 뭔가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블레탈은 유연한 몸동작으로 일어나 길 저편으로 오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말에 끌린 흰 마차. 좌우로 말을 탄 익숙한 얼굴의 호위들이 보이는 걸로봐서 에스트라의 마차였다. 확실했다. 그렇다면 라인님도 같이 왔을 것이다. 라인님과 같이 갔으니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초조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블레탈은 마차가 자신 앞에서 멈춰 설 때까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블레탈. 하지만 그 마차에서 고개를 내민 것은 라인이 아닌 에스트라였다. "어머, 블레탈. 여기서 뭐하고 있어?" 화려한 분홍빛의 모피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에스트라는 푸른 눈에 반가움을 가득담고 블레탈을 바라보았다. 블레탈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에스트라님. 다시 뵙습니다. 혹시 라인님은?" "모르겠는데? 모임에 갈 때 데리러 온 이후 못봤어. 설마 아직 돌아오지 않은거야?" "예." "왕도에서 노는 중인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추우니까 어서 마차 안으로 들어와." 턱하고 맥이 풀리며 다시 치솟는 초조감에 블레탈의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나간 게 삼일 전인데 에스트라도 모르다니. 블레탈은 초조함을 애써 가다듬으며 에스트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라인님을 기다리는 중이라." "어서 타." 사근사근 상냥한 듯 하지만 가차없는 명령조의 말투. 두번이나 귀족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기에 블레탈은 마차에 탈 수 밖에 없었다. 말에 타고 있던 호위기사 둘이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블레탈은 속으로 비웃으며 마차안에 자리를 잡았다. 제 주인이 자신에게 빠져있는데 제깟것이 어쩔텐가. 마차는 밖보다 훨씬 아늑하고 따뜻했다. 두툼한 모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블레탈이 생각에 잠기자 에스트라가 옅은 홍조를 띈 채 그를 바라보았다. 깎은 듯이 날카롭고 섬세한 이목구비와 하얗게 바스라질 듯 아름다운 피부. 차갑기 그지없는 보랏빛 화려한 눈동자와 긴 머리카락은 마치 성서에나 나올법한 천신같았다. 에스트라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블레탈의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보랏빛 자수정으로 뽑아낸 듯한 그 아름다움에 에스트라는 도취되고 말았다. "블레탈. 나랑 가자." "....." "중인의 하인으로 사는 것 보다, 나 같은 귀족의 시종이 되는 게 좋지 않니? 난 네가 너무 좋단 말야." 시종이 아니라 애인이겠지. 블레탈은 순간 비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차갑지만 매력적인 눈으로 에스트라를 바라보았다. 환상적인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하자 에스트라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멍하니 블레탈을 바라보았다. 지금 블레탈이 자신의 가치를 매기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나쁘지는 않아.' 객관적으로 따져봐도 에스트라는 미인이다. 굽슬친 화려한 금발도 홍조 띈 하얀 피부도. 커다란 푸른눈과 기다란 목, 옷깃에 가려져 있지만 적당히 부푼 가슴이나 한 팔에 감길 잘록한 허리도 블레탈의 심미안에 맞았다. 게다가 순진하기까지 하니 손에 잡고 맘대로 휘두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에스트라보다 생생히 기억나는 그의 모습. 밤을 닮은 머리카락과 빛이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 창백한 하얀 얼굴에 섬세하고 우아한 이목구비. 무심히 내뱉는 말 하나 작은 행동하나까지 기품과 절도로 가득찬 그. 그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이 소녀가 가진 것이란 귀족이라는 지위와 잘난 외모뿐, 중인이긴 하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졌고 혼자서 자신의 삶을 사는 라인님과는 틀린 것이다. 그 때 머릿속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귀족이니까 라인님이 어디 계신지 쉽게 찾을 수 있겠지. 그리고 사실 초대한 손님이 귀가를 했는지 안했는지, 귀족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블레탈의 눈이 살풋 가늘어지며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태를 띄자 에스트라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개졌다. "에스트라님." "으응?" 블레탈은 오른손을 뻗어 에스트라의 목을 휘감고 키스할 듯 몸을 밀착했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에스트라의 허리를 감쌌다. 마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자세에 에스트라의 얼굴이 멍해졌다. 순간 블레탈의 마력적인 자수정빛 눈동자가 아찔할 정도로 부드럽게 빛났다. 그리고 오싹하리만치 낮은 목소리로 에스트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인님이 걱정이 되서 견딜 수가 없군요. 정말 모르십니까?" 침대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피로가 덜 풀린 것도 있지만 몇 일 새 안게 된 고민들로 스트레스가 쌓인 탓도 있을 것이다. 머리를 한 번 흔들고 옷을 벗은 채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하얀 김이 내 얼굴로 따뜻하게 밀려온다.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물이 받혀진 욕조에는 장미 잎이 한 아름 떠서 하늘하늘 몸을 흔들고 있었다. 분명 이 고급 여관의 하인들이 내가 일어나기 전, 목욕물을 준비하면서 띄어둔 거겠지. 하인이 필요 없다고 지배인에게 말하자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는 몰라도, 자고 있거나 잠시 자리를 비울 때만 하인들이 왔다 가는 것만 같다. 그 때문에 난 이 곳에서 지내는 내내 내 시중을 드는 하인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분명 지금 내가 목욕하는 이 순간에는 내가 지내는 방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욕조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천장에 박힌 색색의 화려한 타일이 어지러운 머릿속을 떠돈다. 이 곳에서 내가 가지게 된 상상도 못할 부와 중인이라는 신분. 그에 따른 갖은 시선들과 뒤에 따라올 수군거림을 생각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었다. 적의 어린 시선, 날 이용하려고 하는 시선에 대한 두려움. 큰돈이라고 해 봤자 여태껏 십 만원 정도밖에 쥐어보지 못했던 내가 이런 큰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 그리고 이 돈 때문에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염려들. 내겐 날 지켜줄 누나도 친구들도 없다. 이 세계에서 집이라고 있는 그 곳도 사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날 어려운 주인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난 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에 남 몰래 하인 상회의 여관에 틀어박혀 생각에 잠기길 여러 일. 그리고 마침내 답이 나왔다. '힘을 키우자. 날 아무도 우습게 여기지 못하게.'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이런 큰 돈 같은 것 상상해 본 적도 다룰 줄도 모른다고 해서 겁쟁이처럼 있을 수는 없지. 내가 아무리 피해봤자 이 세계 안. 이 곳의 사람들은 끝없이 내가 가진 것을 탐내고, 나보다 높은 신분의 인간들은 날 업신여길 테니. 하지만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중인'이라는 신분과 '부'를 이용해 힘을 키운다면 버러지 같은 놈들은 내게 함부로 굴지 못할 거야. 날 이용가치 있는 물건으로 볼 수도 없을 테고 더불어 그 키에른이란 귀족처럼 날 모욕할 수도 없을 테지! "그런 꼴은 두 번 다시 당하지 않겠어." 내 머리에 술을 끼얹고 탁자에 박았었다. 그 때의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절로 모르게 속에서 열이 치민다. 갖은 험한 꼴을 당해 본 적이 있는 나이기에 참을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크게 일이 났을지도 모르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욕실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중들 필요 없습니다."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하는데도 인기척은 아무 말 없이 다가 오더니 마침내 내 위에서 멈추었다. 불쾌해져서 눈을 뜨니 낯익은 얼굴이 바로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다. 냉소적으로 빛나는 갈색눈동자. "알레그로?" "갈 데가 있어." "갈 데라니?" 갑자기 불쑥 찾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목욕하는 와중에 들어와 놓고는 다짜고짜 저런 말을 하다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지만 역시나 괴팍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내 얼굴에 수건을 던지고는 밖으로 나가버렸고, 난 대충 몸을 닦고 목욕도 제대로 못 한 채 욕실을 나왔다. 옷을 다 입을 때까지 문에 기대어 기다리던 알레그로는 내가 외투까지 갖춰 입은 것을 보고는 휙 밖으로 사라졌다. 난 알레그로를 따라 하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여관을 나와, 그가 향하는 곳으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깨끗한 건물과 가지런히 정리된 길이 깔린 중심가를 지나 녀석은 내가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퇴색된 벽의 건물들이 하나 둘 씩 보이고, 바닥은 이내 가지런한 길이 아닌 뭇 흙과 돌이 드문드문 보이는 오래된 블록이 대신했다. 오가던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알레그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교활한 놈들보다 타락한 놈들이 낫겠지?" "타락한 놈들?" 잠시 머리를 굴리니 곧 어떻게 되어 가는 상황인지 짐작이 간다. 내게 어떤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려고 하는 생각일까? 그것도 지독한 쓰레기들을. "교활한 놈들은 널 이용할 생각밖에 안 할 테지. 처음부터 그런 것들을 상대하려면 짜증나겠지? 하지만 우리가 만나러 가는 녀석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거든. 너에 대해서 제대로 알 리가 없어." 타락한 놈들이라는 말이 걸리긴 하지만, 확실히 날 이용하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상대한다면 얻는 건?" "힘이지. 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니까. 넌 그것을 바라고 있던 거 아냐?" "하지만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면 알고 지내는 게 해가 될 수도 있지 않아? 전의 네 말대로라면 아무래도 내 평가는 좋지 않을 텐데 그런 녀석들이랑 지내는 걸 남들이 알면 더 좋지 않을 거야." "어차피 넌 받은 유산으로 먹고 놀기만 하는 놈으로 낙인찍혔어. 평가가 더 나빠져 봤자지." 알레그로는 픽 하고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을 들어 주위를 가리켰다. "이 주위가 그 '타락한 놈'들의 구역이야. 이곳에 있는 집들과 땅은 녀석들의 소유. 그래서 이 주위에 사는 누구도 녀석들의 취미생활에 간섭할 엄두를 못 내. 게다가 녀석들은 집에서도 내놓은 녀석 혹은 너처럼 혼자인 놈들이 대부분이라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고있지. " "취미생활?" "섹스, 약, 술. 대충 이 정도 말하면 알겠지? 같은 중인은 함부로 건들지 못하지만, 평민이나 노예를 데려다가 이상한 짓을 하는 놈들도 있어. " 그러면서 알레그로는 '너 같은 녀석은 짐작도 못하겠지.'하고 빈정댔다. 아니. 그런 것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아. 누나는 그런 것들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난 어릴 때부터 윤락업을 하는 누나나 형들과 알고 지냈으니. 그리고 누나나 형들은 매번 지루함을 이긴다는 이유로 난잡한 성교 파티를 벌이고 마약을 하고, 비싼 양주를 퍼마시는 사람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했다. "역겹군." 알레그로가 시니컬한 어조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쓰레기치고는 가치 있는 놈들이지." 대체 그런 놈들과 알고 지내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알레그로가 거짓을 말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잠자코 녀석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때 앞에서 어떤 여자가 튀어 나왔다. 추운 날씨에도 허벅지와 가슴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붉은 섀도우가 발린 눈을 깜빡이며 비틀비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날 보고 배시시 웃는다. "처음 보는 새낀데... 나랑 한 번 할래?" 약에 취한 듯 풀린 눈을 유혹하듯 치뜨고는 손을 뻗어 내 옷깃을 잡으려고 한다. 내가 그것을 피하자 여자는 새침한 표정을 짓더니 곧 배시시 웃으며 가버린다. '생각 없음 다른 사람이랑 하지 뭐...'하고 중얼거리며. 그 때 알레그로가 말했다. "저 여자 헤른을 먹었군. 중독성도 있고 무엇보다 효능이 뛰어난 미약이기 때문에 먹고 나면 정신이 나가버리지. 놈들은 네게도 권할거야." 미약이라. 저런 것을 함부로 써대는 놈들과 얼굴을 꼭 맞대야 하는 걸까. 왠지 자꾸 드는 음습하고 위험한 느낌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곳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얼굴 그만 찡그리지? 나도 참고 있잖아?" 그러면서 잔뜩 비웃는 표정을 짓는 알레그로를 보니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날 돕는 걸까. 그러나 그 질문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녀석들이랑 만나면 어떻게 해야하지?"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해. " "...그렇게 하면 놈들과 싸우게 될 지도 모르는데?" 욕을 날릴지도 모르니까. 알레그로는 내 말에 픽 웃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것도 좋겠지." "뭐?" "네가 욕을 하던 놈들을 무시하건 간에, 넌 네 목표를 조만간 달성할 수 있을 거야. 더 이상 묻지마. 답하기 귀찮으니까." 무시하건 욕을 하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니. 놈들과 친분을 쌓는 게 목적일 텐데 그래도 된다고? 날 보기만 하면 친근감이 절로 솟는 것도 아닐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궁금하지만 저렇게 딱 잘라 질문하지 말라고 하니 묻기도 뭐해서 잠자코 걷기만 했다. 여자가 있던 길목을 지나쳐 알레그로와 함께 조금 더 가니 말라 틀어진 나무 곁에 주변 건물보다 제법 커다란 일층 집이 서있는 게 보였다. 낡아빠진 회색 벽돌에 검은 지붕을 한 일층 집은 주위의 더러운 골목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려 있다. 음침한 느낌에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알레그로는 나와 함께 그 집 현관 앞에 서더니 주저 없이 발로 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소리가 제법 컸을 텐데도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알레그로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나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아직 아침인데도 건물 안은 한없이 어둡고 눅눅하다. 그걸 건물의 주인도 알고 있는 듯 벽에는 촛대가 하나씩 걸려 꺼질듯 말 듯 아찔한 불빛을 흔들고 있다. 그 흔들림에 한 껏 이지러져 보이는 오래된 복도가 왠지 위험한 요부의 은밀한 그곳처럼 길을 내어보인다. 마침내 복도 안 어느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한껏 얽힌 교성과 진득하게 묻어오는 신음소리와 날카로운 깔깔거림. 또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미친 고함소리와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미친새끼들." 알레그로가 비죽히 웃으며, 이 저택에 들어올 때 그랬던 것 처럼 발로 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문이 쾅 하고 열리며 안쪽의 광경이 훤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미쳐있었다. 갈가리 찢긴 옷의 여자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입으로는 남자의 성기를 물고, 아래로는 다른 여자의 입술이 그녀의 음부를 지분대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한 구석에서는 어린 소년이 깔깔거리며 엉덩이를 흔든 채 어떤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또 한 쪽에서는 약에 취한듯 눈이 풀린 사람들이 시체처럼 늘어져 히죽히죽 거리고,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한 번에 여러명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짐승처럼 그들의 옷을 찢어 발긴다. 코로 확 끼쳐오는 몽롱한 약 냄새와 진한 술냄새, 달콤하다 못해 역겹기 까지한 향수냄새가 그들의 체취와 한데 뒤섞여 절로 구역질이 치민다. 광기와 타락에 찌들린 사람들의 미친 정사에 어떻게 흥분할 수 있을까. 누나. 이런 것이었기 때문에 내게 그토록 누나를 본받지 말라고, 누나가 일하는 곳 근처에 얼씬도 말라고, 누나가 일하는 곳의 사람들과는 안면도 익히지 말라고 했던거였어? "정신차리지 그래?" 그 때 알레그로가 내 어깨를 쳤다. 녀석은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턱 짓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정작 가장 미친 건 저 놈들이야. " '설마 벌써부터 진이 빠진 건 아니겠지?'라고 말하는 듯한 갈색 눈동자에, 알레그로가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미친 사람들 가운데 여유롭게 앉아, 낄낄거리고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시는 소년 소녀들. 미쳐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야하긴 하지만 옷을 제대로 걸쳐입은 그들은, 히죽거리며 간간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니. 소름이 돋는다. 가슴 안 쪽에서 치솟는 혐오감과 분노에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발을 내딛자 마자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에 발목이 잠겨들었다. 미친 사람들은 제 욕망을 채우는 데 정신이 없어 나나 알레그로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침내 '가장 미친 놈들' 앞에 다다르자, 그들 중 한 명이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우릴 올려다 본다. 알레그로와 내가 자리에 앉자 녀석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었고, 게 중 가슴이 다 드러나는 망사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잔에 술을 부어 우리에게 내밀었다. "화끈해. 죽여준다고. 자. 들이켜 봐." 혀로 입술을 핥으며 유혹하듯 눈웃음을 치는 소녀의 잔. 하지만 오는 길에 발정난 암캐처럼 눈이 풀려 히히적거리는 여자를 본 나이기에 그 잔을 받아들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건 알레그로도 마찬가지인 듯, 알레그로는 특유의 비웃음으로 일관하며 비아냥거렸다. "혼자 마시고 불타시지?" "뭐어야아. 나 혼자 하는 걸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면서 깔깔대더니 옆에 있던 다른 소녀와 진하게 키스를 한다. 같이 술을 마시던 소녀와 소년들이 딴 데 가서 하라고 외쳐대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쳐 뒹구는 사람들 틈으로 가버렸다. 그들에겐 이 모든 게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약을 하려고 온 게 아니면?" 한 소년의 질문에 알레그로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에 이 부근으로 온 캐롤 라인이야. 인사차 들렸지." 그러자 날 뚫어져라 보는 '미친 놈들'. 탐색하듯 나를 샅샅히 훑는 듯한 시선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선다. 하지만 애써 참으며 옅게 미소지었다. 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알레그로가 힘을 얻으려면 이 녀석들과 친분을 쌓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알레그로는 마음 내키는 데로 하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캐롤 라인이라고 한다." 인사하자 놈들은 잠시 아무 말을 않고 날 흘끔거리기만 하더니 저희들끼리 뭔가 소근거렸다. 그러더니 하나 둘 씩 내게 손을 내밀며 눈을 빛낸다. "반갑다, 난 처키." "난 메샤. 구질구질한 왕도에 온 것을 환영해." "난 바윈." 놈들의 눈빛은 마치 미친 살쾡이의 그것 같아 손잡기가 꺼려졌지만, 난 일일이 그들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인사를 받던 중 묵묵히 술만 마시던 한 소녀가 '잠깐.'하며 인사를 막았다. 소녀의 연갈색 눈동자는 이 곳과 어울리지 않게 침착했다. "제하 알레그로. 난 네가 싫어. "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인데, 다이엔?" "인사가 끝났다면 얼른 네 친구를 데리고 떠나. 좀 있으면 하이드가 올거야." 하이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친 놈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내지르며,'하이드가 오늘 온다고?','그럼 또 신나게 놀 수 있겠는데!'하며 법석을 피웠다. 잘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의 대장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게 소란스러운 놈들과는 달리 제법 침착한 표정의 다이엔이라는 소녀는 경고하듯 낮게 말했다. "어서 떠나. 하이드가 온단 말이야." "그렇다면 잘 됐군. 난 사실 라인에게 하이드를 소개시키려는 참이었거든." 그러자 다이엔이 갑자기 날 휙 돌아본다. "얼른 떠나." 아까 전까지 침착했던 모습과는 달리 흔들리는 목소리.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알레그로를 흘낏 보니 언제나 그렇듯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다. 알레그로. 너 대체 나에게 어떤 놈을 소개시켜 주 려는 거지? "타락하기 싫으면 어서 떠나란 말야. 넌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어서 꺼지라고!" "그럴 수 없어." 난 싸늘하게 답했다. 난 힘을 얻겠다고 마음 먹었으니까. 그러자 다이엔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곧 그녀가 중얼거렸다. "왔어." 뭐가? 되묻기가 무섭게 난 두 눈을 흡뜨고 말았다. 다이엔의 눈에서 맑은빛이 사라진 순간, 갈색 머리카락이 뱀처럼 꾸물거리며 확 늘어났다. 순식간에 그녀의 엉덩이까지 뻗어내린 머리카락은 끝부터 급속도로 잉크를 떨어 뜨린 듯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뚜드득 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과 다리가 순식간에 길게 자라났다. 볼록 솟은 그녀의 가슴이 평편하게 변하고 목에서 울대가 튀어 나오는 것을 할 말을 잊은 채 지켜보고 있는데, 다이엔의 갈색 홍채가 고양이의 것처럼 쭉 늘어나더니 번들번들한 황금색으로 변하며 살짝 희어졌다. 순간 그 밑에 자리잡은 붉은 입술이 선명한 곡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안녕. 캐롤라인?" 다이엔, 아니. 하이드의 소름끼치는 금색 눈동자가 날 주시했다. 어떻게 한 사람의 몸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튀어나올 수 있는 거지? 하이드의 광택이 도는 황금빛 눈동자에 소름이 돋는다. 마치 맛있는 쥐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그렇게 날 바라보는 눈동자. 순간 하이드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손을 뻗었다. 엉겁결에 몸을 뒤로 젖히니 하이드가 눈썹을 과장되게 찌푸리며 외친다. "날 괴물처럼 보는거야? 슬픈데!" "누구라도 손을 갑자기 뻗으면 움찔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알레그로." 알레그로는 갈빛 눈동자로 날 쳐다본다. 마치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라는 듯. 난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하이드를 바라보았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긴 했지만 역시 저 금색 눈동자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캐롤라인이야." 손을 내미니 하이드는 내 손을 재빠르게 잡았다. 그와 동시에 서늘한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온다. 시릴정도의 차가움에 얼른 손을 놓아버리려고 하는데 하이드는 엄청난 힘으로 내 손목을 꽉 붙들었다. 손목이 부서질 것 같은 아픔에 얼굴이 절로 찡그려진다. "내 생각대로야." "뭐?" "따뜻하고 부드러워." "...뜻 모를 소리는 그만하고 좀 놔." 녀석은 내 손을 내팽개치듯 놓으며 '킥'하고 웃더니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날 보는거지? 순간 하이드의 눈동자에서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열기가 타올랐다. 그 열기는 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마치 녀석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문득 드는 불쾌하고 당황스러운 기분에 애써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외면하고 아직까지 욱신대는 손목을 살폈다. 손목에는 뻘건 손자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인장처럼. "어떻게 이렇게 일찍 나온거냐?" 알레그로가 묻자 하이드의 시선이 더욱 더 강해졌다. 나왔다는 것은 다이엔이 하이드가 된 것을 뜻하는 걸까. 다시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날 금색 눈동자로 바라보며 웃고있다. "인을 보려고 나왔지." "인?" "자는 중에 인의 목소리가 들렸어. 부드럽고 차가운 목소리. 그 바람에 졸리는 가운데도 다이엔을 밀치고 억지로 눈을 떴어. 생각대로 인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 인이라면 나를 말하는 건가. 내가 아름답다니. 당황스럽지만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알레그로는 빈정대는 투로 하이드에게 말했다. "그래서 일찍 기상을 하셨다?" "사실 다이엔의 시간을 뺏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계집이 인을 자꾸 쫓아내려고 하잖아. 그런데도 인이 날 만나야겠다고 하길래, 다이엔 을 밀쳐내고 얼른 나왔지." "다이엔이 나중에 뭐라 할 텐데?" "그건 내 일이야, 제하 알레그로. 게다가 너도 땍땍 대는 다이엔보 다 내가 낫다고 느끼지 않아?" "전혀. 너나 다이엔이나 그게 그거야."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하이드는 일종의 이중인격 중 하나란 걸까. 몸까지 달라지는 것만 제외하면, 지구에서도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으니까. 그래. 그래서 날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일종의 정신분열증 환자니까. 그 때 하이드가 갑자기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인, 너도 내가 좋지?" 잘생긴 얼굴에 박힌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오싹하지만 난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녀석은 환자고, 대놓고 호의를 표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잖아? "그래..." 게다가 싫건 좋건 일단 힘을 키우기 위해 하이드와 친해져야 하니까. 하이드는 붉은 입술로 히죽 웃더니, '자 그럼 인을 위해 재밌는 걸 보여줘야지.' 하며 손벽을 쳤다. 그 때 알레그로가 끼어들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제 가봐야겠어." "뭐야?"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하이드의 얼굴. 금색 눈동자가 형형한 살기를 품고 알레그로를 노려본다. 왜 이 정도 말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불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알레그로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한가한 너와 달리 우리는 꽤 바쁘거든." "인. 정말 지금 가야되는 거야?" 하이드는 알레그로를 무시하고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려보듯 날 바라보는 시선에 숨이 턱하니 막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이드는 '킥'하고 웃으며 '아쉽네'라고 하더니 입맛을 다신다. "그럼 어서 꺼지라고 제하 알레그로." "뜻대로 해 드리지." 알레그로의 눈짓에 알레그로를 따라 일어서는데, 하이드가 순간 요사하게 날 보며 웃었다. "또 보자, 인." 날 삼킬 듯 바라보는 예의 그 눈동자. 등 뒤로 녀석의 타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재빨리 알레그로를 따랐다. 다행히 방에서 나와 문을 닫은 순간, 녀석의 시선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지옥과도 같은 그들의 아지트를 빠져나와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는 송글송글한 땀이 맺혀 기분 나쁘게 차갑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거야?" 문득 드는 생각에 알레그로를 돌아보았다. "인사만으로도 충분해. 더 있었다면 구역질나는 꼬락서니를 봤어야 했을테니까." "무슨 소리지?" "하이드가 뭘 보여주겠다며 그랬잖아. 뻔하지. " 강간. 폭행. 약. 살인.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순간 몸이 경직된다. 알레그로의 말 대로 우리는 못 볼 꼴을 더 볼 뻔 했을지도. 그 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하이드. "그나저나 너무 반응이 과한데?" "반응이 과하다니?" "너 같은 놈을 그런 악마새끼랑 마주치게 하면 움쭉달싹도 못 할 것이라 믿었지만." "무슨 소리야?" "원래 사람은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 다가가면서도, 전혀 반대의 부류에게는 함부로 손을 못 대는 법이지." 반대의 부류? "저런 악마새끼가 너 같은 사람을 만나 봤기나 했겠냐. 온통 주변이 어둠 그 자체인데. 게다가 다이엔." "다이엔?" "다이엔은 하이드와 달리 머리가 꽤 좋아서 너에 대해서 대충 알고 있을거야. 그러니 네 이름을 듣고, 혹시나 하이드가 나중에 널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꺼져라는 둥의 소리를 지껄였겠지. 사실 하이드가 너한테 반감을 가져도 다이엔이 적당히 막으리라는 계산도 했었지." 그러니까 하이드가 나에 대해 가진 호감은, 전혀 다른 타입의 사람에게 느끼는 호기심과 같은 것이란 말일까. 그렇지만 역시 달갑지 않군.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날 옭아매던 그 눈동자. 마치 사나운 짐승과도 같던 황금빛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어. 아,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생각을 애써 딴 데로 돌렸다. "둘은 이중인격이지?" "뭐, 그런거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이 일은 사욘 가의 몇 사람들과 우리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 그렇다면 알레그로는 어떻게 이 사실을 아는거지? 내 의아한 시선을 눈치챈 듯 알레그로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답했다. "인간은 뇌라는 무궁무진한 기관을 가지고 있지. 이건 조사와 탐구, 추론에 의해 발전하는 기관이야." 즉, 어떤 방법인지 모르지만 정보를 입수해 추리해 낸 결론이라 이거군.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내가 힘을 얻는데 왜 하이드가 필요하냐 이것 뿐. 알레그로를 뚫어져라 보자 알레그로는 두 손을 들며 항복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알았어. 말해 주지." "어서 말해봐." "네가 평정해야 할 곳은 일단 우리 또래의 중인들이 이끄는 사교계야. 하이드는 악마새끼이긴 하지만, 일단 또래의 녀석들이라면 놈들이 무서워서 함부로 못 해. 놈들과 친하면 네가 불명예스러운 모욕을 당할 확률은 적어진다 이 소리지." 쉽게 풀어보면 누구에게 얻어 맞을 일은 없어진다 이소린가. 하지만 단순히 이런 것 때문에 하이드와 친해지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대로 알레그로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사욘가." "사욘?" "일단 대외적으로 다이엔은 사욘가의 장녀, 하이드는 차남이야. 사욘가는 대대로 이름난 무관을 배출한 기사가문인데다 현재 다이엔과 하이드의 부친인 사욘경은 가장 큰 권력을 쥔 케피니올 가문의 부단장으로 있기 때문에, 왠만한 중인들은 함부로 사욘가의 식솔들을 대하지 못해." 하인상회 본점의 하루하루는 언제나 바쁘다. 엘위론왕국에서 첫째 가는 규모와 재력, 점유율을 지닌 상회인데다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고 있는 왕도의 본점이라서 더 그렇다. 본점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각종 내역보고와 물자들을 관리하고 지시를 내리는 것 뿐만 아니라, 왕도에서 살고있는 수만명이 필요한 물자를 감당해내야 하기 때문에, 상회의 사람들은 언제나 치열한 전쟁과 같은 하루를 치뤄야 한다. 욘도 마찬가지다. "대...체 이 따위 쓸모없이 크기만 한 장식품을 어디다 써먹겠다는 거야?" 간신히 날라온 성인 남자의 키만한 조각상 아래에 주저앉아 욘은 손으로 땀을 훔쳤다. 어느새 식어버린 땀과 땀으로 젖은 옷자락이 차갑기가 그지없다. 그런 욘에게 옆에 있던 존이 한마디 했다. "이건 예술이라고. 솔직히 이런 거 집에 세워두면 폼나잖아?" "야! 이걸 나르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딴 소리가 나오냐?" "사실을 말하는 것 뿐이야. 그리고 솔직히 덕분에 우리가 밥 먹고 살잖냐." 부아가 날 대로 난 욘의 얼굴이 벌개졌다. 저 자식은 왜 하는 말마다 저따위야? 그 때 조장인 제온이 욘의 심상치 않은 얼굴을 보고 나섰다. "그만 좀 해! 왜 또 싸움질이냐?" "솔직히 이런걸 주문해서 사람 꼭두새벽부터 돌나르게 하는 <높으신 나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구요." "에휴. 그렇게 힘들면 여관으로 가봐." "거긴 왜요?" "여관 카운터를 맡은 손씨 알지? 아침에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워야 겠다고 해서 오늘 하루만 카운터를 볼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손씨라면 자신이 잘 아는 아주머니고 전에도 아주머니가 일이 있을 때 종종 카운터를 보기도 했기에, 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벌떡 일어나 창고를 빠져나왔다. 물론 그 전에 존을 놀려준 건 당연하다. "좋아하는 예술들 나르느라 수고 좀 해라! 이 몸은 편히 앉아 카운터나 볼 테니까!" 새벽부터 무거운 것들을 나르느라 고생했는데, 그 고생은 이제 끝이고 오늘 하루는 편히 쉬게 되다니. 기분이 절로 좋아져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며 힘차게 발걸음을 옳겼다. 갑자기 보게 된 밝은 햇살에 욘의 눈이 아팠지만 그 정도는 신경쓸 건덕지가 못 되었다. 욘은 하인상회 건물을 지나 몇 건물 옆에 서 있는 커다란 건물로 들어갔다. 덩치만 커다란 외관과 달리 안은 제법 화려한 건물에 달린 <하인상회 여관>이라는 팻말은 사실 옳지않다. 숙박객보다 하인상회에 오는 손님을 맞을 때가 더 많은, 하인상회 전용 별장이 건물의 실체니까. 그래서 하인상회의 다른 곳보다 매우 한가한 곳이 이곳이었다. "역시 네가 오는구나?" 욘이 들어서자 맞아주는 건 여관 카운터를 보는 손씨였다. 손씨는 머리에 털모자를 쓰고 풍성한 털 외투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제 막 나갈 참인듯 가방을 들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곱게 화장까지 하고 있는 손씨는 급한 걸음으로 욘에게 다가왔다. "나는 바로 가봐야 되거든? 오늘 하루 수고 좀 해라." "알았어요." "아참, 삼 층에 귀한 손님이 묵으시는 중이니까 신경 좀 쓰고." "귀한 손님요?" "아침에 나가셨으니까 돌아오실 때 인사 잘 해." '체. 그냥 편히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하필 '귀한 손님'이 오늘 있 을 게 뭐야. 눈치나 봐야 하는 건가?' 욘은 속으로 투덜대며 손씨를 배웅한 뒤 터덜터덜 카운터 뒤로 가 소파에 철푸덕 앉았다. 그 바람에 제법 좋은 질감의 의자쿠션이 푹신하게 몸을 감아왔다. "하아. 살 맛나네. 역시 카운터에 있으면 이런 게 좋다니까." 손님이 걸리긴 하지만 사실 자신은 앉아있다 열쇠나 내어주면 되는 거니까. 그 때 까지 자신은 적당히 쉬기만 하면 되는 일. 욘은 그런 생각에 안쪽의 서랍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서랍에는 여러권의 책과 종이 뭉치가 있었다. 그 중에는 <알레 프레샹>도 있어 욘은 그것을 꺼내들었다. 그 때 '치링'하는 소리가 들려 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꿀을 녹인듯한 화려한 금발에 커다란 파란 눈망울을 지닌 한 아가씨가 하얀 털외투를 걸치고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 매우 잘생긴 미청년과 함께. 사실 미청년이라기엔 그 외모에 엣된 티가 약간 배여있어, 아직 그가 소년임을 같은 소년인 욘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쭉 뻗은 다리와 팔이나 깎아 지른 듯한 콧날과 섬세한 턱선,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라색 머리카락과 차디찬 보라색 눈동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은 알아채지 못할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홀려버릴 테니까. 완벽한 한 쌍의 커플은 그렇게 마치 그림처럼 욘의 앞까지 다가왔다. "여기 캐롤라인이 묵고 있다고 알고 있어. 그에게 에스트라가 찾아 왔다고 전해." "예,예! 잠시만 기다리십쇼." 아가씨의 햇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욘은 확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손님 장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실 귀족가의 아가씨를 본 적이 처음이었기에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 욘은 이 아가씨의 말투나, 고급으로 보이는 하얀 털 외투에 그렇게 생각했다 - 말로는 언제나 지배 계층에 대한 불평불만에 가득차 있지만, 욘은 아직 19살이니까. 그러면서도 미청년. 아니 미소년에게 힐끔힐끔 불만섞인 눈길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 자식은 사람 기죽일 일 있나. 왜 저렇게 잘생긴거야? 그 때 탁 미소년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하고 말았다. 욘은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지만, 다행이 소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문득 드는 생각. '응? 캐롤라인?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 이름인데?' "빨리 안 찾고 뭐하는 거죠?" "아, 예! 죄송합니다!" 착각인가? 아, 그러고보니 손 아주머니가 말했었지? '아침에 친구분이랑 나가셨으니까 돌아오실 때 인사 잘 해.' "그 분은 아침에 나가셨습니다." 소녀는 그 말에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며 옆에 있던 미소년을 바라보았고 순간 미소년의 눈빛이 소름끼치도록 무섭게 일그러져 욘을 노려보았다. 서늘하고 차가운, 그렇지만 파랗게 타오르는 듯한 보랏빛 눈동자. "방 안에서 기다리고 싶은데." 소년의 나직한 목소리에 쭈삣 등골이 섰다. 함부로 손님의 방에 사람을 들어가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욘은 부랴부랴 열쇠를 챙겨들고 뛰듯 카운터 밖으로 나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욘의 뒤로 쉴 새 없이 두 사람의 또각 뚜벅 대는 발걸음 소리가 따라와 욘은 돋는 소름을 어쩌지 못했다. 욘에게 더 이상 두 사람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미소년이 문제겠지만, 저 아가씨도 미소년의 일행이니 다를건 없을 것이다. 차갑고 서늘하게 빛나는 흉폭한 칼을, 꿈결과 같이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에 감춰두고 있는 저 녀석은 위험인물이다. 욘의 감각은 그렇게 쉴 새 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입니다." 욘은 문을 여는 순간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던 시선이 문 안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고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년의 손이 자신의 멱살을 잡아챈 순간, 숨을 컥컥 내쉴 수 밖에 없었다. 하얗게 가늘어 보이기만 했던 소년의 손은 엄청난 악력으로 자신의 목을 죄고 있어 욘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발자국이 두 개야. 누가 온 거지?" 죽일 듯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욘은 소리는 커녕 숨 쉬기도 곤란한 상태. 그 때 금발의 소녀가 소년을 말렸다. "블레탈, 죽겠어." 욘의 목을 죄고있던 힘이 사라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헉헉 들이쉬는 욘의 귀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렸다. "블레탈은 너무 캐롤라인 걱정을 하는 것 같아." "에스트라님..." 그 말을 끝으로 주인 없는 방에 멋대로 들어가 버린 두 사람. 욘의 가슴구석이 불똥이 튀긴 듯 끓어올랐다. 욕지거리를 퍼붓고 싶었지만 신분의 차이는 크다. "제길."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개미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 뿐이라니. 지랄 맞을 새끼. 욘이 등을 돌려 바삐 방 앞을 벗어나려 하는데 누군가의 모습이 계단 쪽에서 점점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왠지 심상찮아 욘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방주인이야? 좆같네!' 함부로 방에 사람들을 들어가게 했으니, 타박 맞을 게 분명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돌덩이나 나를 걸. '재수 우라지게 없네.' 자꾸 수그러드는 고개를 들고 내키지 않는 발을 한걸음씩 옳기는 욘은 문득 앞에서 오는 손님이 매우 익숙한 분위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뚜벅뚜벅. 한 걸음씩 다가오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 남들에게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그 분위기는 기품이란 것일거다. 그 손님이 점점 욘에게 가까워지면 질수록, 욘의 마음은 확신으로 가득 찼다. 전처럼 검은 색의 이국적인 옷차림을 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창백한 하얀 얼굴에 어둠을 담은 눈동자. 분명 전에 봤던 그 도련님이다. "도, 도련님!" 그가 지나치려던 순간, 욘은 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검은 눈동자가 그에게 의문의 빛을 안고 돌려진 순간, 욘은 왠지 그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고 생각했다. "뭡니까." "전에 뵈었지요, 욘이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귀찮음과 피곤함이 가득한 말투. 왠지 금방 대화가 끝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욘은 초조해졌다. 그래서일 것이다. 대뜸 꺼내지 말아야 할 말 부터 꺼낸 건. "저, 도련님 방에 난데없이 높은 분들이 들어가셔서..." "누굽니까?" "예?" "누구냐고!" 단정하고 창백한 도련님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졌다. 아. 욘. 넌 대체 오늘 되는 일이 없냐? 욘은 자신의 멍청함에 한숨부터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더듬댔다. "이, 이야기하시는 걸 들으니 블레탈과 에스트라..." "젠장!" 만나고 싶지않다. 호의를 줘봤자 그걸 '주인이 주는 것'으로만 인식하는 녀석의 낯을 보기란 힘든 일이다. 게다가 날 가증스러운 소리만 하는 웃긴 놈으로 생각하고 있을테니. 아무래도 오늘은 다른 곳에서 자야겠군. 답답하게 막힌 가슴을 트기위해 숨을 쉬어도, 여전히 씁쓰레한 기운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 기운을 털기 위해 도망치듯 등을 돌려 문 앞을 벗어났다. 급히 복도를 지나 계단을 밟고 내려와 여관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뒤로 팔이 확 끌렸다.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간만에 본 블레탈의 얼굴은 그 때처럼 굳어있다. 화가 난 걸까? 하긴 내가 주인이니 찾고 싶지 않아도 이곳까지 찾으러 와야 했겠지. "볼일이 있었어. 나중에 갈 테니 먼저 집에 가." 잡힌 팔을 억지로 빼려는데 놓지를 않는다. 아무리 기분이 더럽다고 해도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짜증이 치밀어 놓으라고 외치려는 순간, 블레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싫은 겁니까?" "뭐?" 더 없이 아픈 듯 일그러지는 블레탈의 얼굴. 그게 아니라, "날 싫어하는 건 너였잖아..." 어지러움에 말하니 블레탈은 새차게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어느 때나 라인님을 미워한 적은 없었습니다." "거짓말 할 필요없어."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거다. 그래. 그런거야. 주인에게 잘못 보이면 좋지 않으니까.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억지로 블레탈에게서 팔을 빼고 몸을 휙 돌렸다.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라인님!" "이야기 하고싶지 않으니까 가!" "라인님!" "가라고!" 신경질적으로 외치는데 그런 내 앞을 잔뜩 성난 모습의 블레탈이 가로막고는 외쳤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언제나 조용하고 차갑던 블레탈이 맞는 걸까? 이글이글 불타는 듯한 눈동자가 날 뚫어질 듯 본다. "난 당신을 미워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왜 그런 태도를 보였던 거지?" 뭐라 말 해도 믿지 않았잖아? 본분을 망각했던 것일 뿐이라는 소리만 했지. 그리고 에스트라에게 한 거짓말을 들은 후에 이렇게 생각 했을 거야. '실제로는 날 하인취급하는 주제에 앞에서는 널 인간으로 여긴다는 둥의 헛소리를 하다니.' 가슴이 쓰리다. 왜 이렇게 답답한지, 화가 나는지, 눈물이 날 것 같은지. 아픔에나오는 한숨을 애써 가다듬는데, 블레탈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하니까." 뭐라고? "당신을 좋아하니까."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블레탈을 마주 본 채 눈만 깜박였다. 허나 블레탈의 입술을 천천히 열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신을 좋아하니까." 목이 컥 매어온다. "제가 화를 냈던 건...당신이 주인이어서가 아니라, 캐롤라인. 당신을 좋아하니까. 그런데도 날... 다른 노예들과 다를 바 없이 보니까. 그게 화가나서 그랬던 겁니다." 혼란스럽다. 진짜일까? 거짓말? 허나 슬그머니 올려다 본 블레탈의 얼굴은 어느 때 보다 진지해 보여서, 그 순간 난 깨달을 수 있었다. 헛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멍청한 이라인. 블레탈은 진심을 말하는 거야. 넌 여태까지 멋대로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구나. "내가 주인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을 좋아할 뿐입니다." 날 미워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날 주인으로 보기보다는 같은 인간으로서 좋아한다고? 눈이 벌개지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라인님?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는 블레탈. 애써 벌개지는 눈을 감추며 피식 웃었다. "님은 무슨 님? 이미 말 텄잖아." "그건 제가 그만 홧김에..." "그런 얼굴 할 필요없어. 이깟 일로 친구를 혼내진 않아." "친구...?" 블레탈이 당황하는 꼴을 보니 더 웃음이 나온다. 여태껏 날 심적으로 괴롭힌데에 대한 심술이라면 심술일까. 하지만 동시에 삐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누구도 날 한 사람으로 대하기보다는, 주인 혹은 중인소년으로만 대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을 맞대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누나도, 넉살좋은 형들과 친구들도 없이, 이 차갑기 만한 낯선 곳에서 외롭게 지내야 할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난 친구가 필요했었다.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나와 블레탈간의 냉전은 끝이났다. 난 블레탈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 에스트라와 인사를 한 다음 에스트라가 마차를 태워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상회의 마차를 탔다. 그녀를 무시한 채 곧장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귀족 청년 모임에서 알게 된 그녀의 블레탈에 대한 애정에 조금 덜 미워 보이기도 했다고나 할까. 그간 에스트라가 내 집을 들락거리며 날 귀찮게 한 것이라든가, 그로 인해 빚어진 나와 에스트라에 대한 웃기지도 않은 장밋빛 소문이 왕도 전체에 파다한 것을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말이다. "헌데..." 역시 상회의 마차 보다는 에스트라의 사촌오빠인 훼아라스와 탔던 귀족의 마차가 낫다고 생각하며 멀미에 인상을 쓰고 있는데, 블레탈이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들자 블레탈의 보라색 눈이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혼자 숙소에 계셨던 겁니까?" "응." 첫날은 제하 알레그로의 집에서 지냈지만 그런 것 까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모임에서 키에른이라는 귀족이 내게 술을 끼얹고 탁자에 내 머리를 박게 했다고는. 화를 참고 있는 날 알레그로가 도발해 파하스 가의 저택에서 데려와 제 집에 재웠다고는. 그런 일을 말하고 싶진 않아. "왕도에서 여러가지 할 일이 있었어. 앞으로 할 일도 생각해야했고." "할 일?" "너도 알다시피 난 집에서 놀고만 있잖아. 뭘 해야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 알레그로가 권하는 데로 사람들을 만나 '힘'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산타 할아버지가 준 재산만 의지하며 살 수는 없지. 나도 사람인 이상 지금은 내가 손에 거머쥐게 된 이 엄청난 재산에 질려 함부로 쓸 엄두를 못 내고 있다지만, 내가 그것에만 의지하고 그 재산을 쓰면 쓰게 될 수록 언젠가는 하염없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특히 나 같이 큰돈은 고사하고 작은 용돈도 제대로 쥐어보지 못해 돈을 관리하는 데 서툰 녀석이 그것을 제대로 지켜 낼 수 있을 리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문배달을 하거나 아는 형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아 페스트 푸드 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 뿐 인데다, 애써 따 두었던 워드 프로세서나 엑셀 자격증도 이곳에선 쓸모없는 게 됐지만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라인님께선 그림을 그리시지 않습니까." "그림?" "예." 내가 연필로 그리던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쓰게 배어져 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난 화가를 할 정도의 그림실력은 가지고 있지 않아." 게다가 난 미술학원은 삼 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미술부활동을 하고 학원을 다니며 그림에 빠져 지냈던 때가 있었지만 일 년 전의 일로 그림에 대한 꿈을 접었지. 그래도 차마 놓지 못한 미련에 연필로만 그림을 몰래 끄적이곤 했지만 붓을 놓은 지가 벌써 일 년이다. 겨우 나 정도의 실력으로 화가라니. "나는 그렇다 치고. 넌 뭐 하고 싶은 것 없어?" "저는 라인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너도 하고 싶은 게 있을 텐데. 뭐라도 괜찮으니까 말해 봐." 내 말에 매우 당황한 듯한 기색의 블레탈은 아무 말이 없었다. 참고 블레탈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블레탈은 확실히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 많이 틀려졌다.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 생각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후회했지만, 블레탈은 날 미워하거나 경멸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날 걱정해 <스스로>날 찾아왔으니까. 아직은 많이 어색하지만 이렇게 차츰차츰 진정한 한 개인으로 거듭나겠지. 넌 곧 그렇게 될 거야 블레탈. 그렇게 나는 나대로 블레탈은 블레탈대로 상념에 빠져 우린 마차가 숲에 들어서 호수를 지나 집앞에 도착할 때 까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렸을 때는 집 안에서 샘 할아버지와 피에, 흄이 뛰어나오고 있었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걱정했습니다." "다녀왔어." 주름진 눈이 매우 기쁘게 웃는 것을 보니 뭔가 느낌이 묘하다고나 할까. 내가 바라는데로 날 '동등한 인간'으로서 보지 못하는 저들이다. 하지만 블레탈과 마찬가지로 저들은 내가 '주인이라서'가 아니라 날 그저 '좋아해서' 걱정했던 게 아닐까. 알고있었다. 저들은 내가 주인이라서 내게 간살을 떨 정도의 교활함을 지니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이 이상한 신분제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블레탈과의 싸움 아닌 싸움으로 폭발해 그들에게까지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내게 된 것이다. "미안해." 셋 다 날 놀란 표정으로 쳐다본다. 어색하기도 하거니와 더 이상 말하면 분명 뻔한 행동. 이를테면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몹쓸 놈들이지요!''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등등을 외치며 무릎을 꿇을 게 뻔하니 난 그들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돌아온 집 거실에선 훈훈하게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주인님. 이 것 드십시요." 그 때 피에가 내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내밀었다. 갓 데운 듯한 따뜻한 우유. 맛을 보니 비린맛이 남아있지만 왜 하필이면 우유를 데워 놨는지 알 것도 같아서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항상 우유를 데워 거기에 꿀이나 설탕을 넣는 것을 보고 내가 우유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구나. "방금 데운 것 같은데.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데워둔 거야?" "헤헤. 블레탈님이 주인님을 모시러 갔잖아요. 혹시 오늘은 돌아오시지 않을까 해서." 흄이 개구지게 웃었다. 그 날 저녁은 오랜만에 맘 편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 후 몇 일 간은 간만에 그림을 그리거나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태껏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던 이곳에서의 인간관계라던지 누나에 대한 그리움도 이제는 그다지 나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어떤 일도 나중에는 희미하게 지우고 마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하고 생각할 때는 씁쓰레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난 이곳에서 살아야하고 이곳에서 미래를 닦아야 하니까. 누나. 그렇지만 누나를 잊는 일은 없을꺼야. 예전처럼 미칠 듯 그리운 일도 없겠지만. 내가 그린 누나의 초상을 끼워둔 팬던트를 가만히 바라보다 침대에서 일어섰다. 으슬으슬한 냉기가 내 다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게 느껴져 잠시 몸을 떨곤 집안에서 입는 외투로 몸을 감쌌다. 집안에서 입는 외투라니. 역시 한국이 아니긴 아니구나 하고 중얼거리다 슬리퍼를 끈채 일층으로 내려갔다.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흄이 물동이를 든 채 명랑하게 웃는 것을 보고 가만 고개를 끄덕이니 옆에서 서 있던 피에가 정중히 내게 말했다. "욕조에 물을 다 부어 놓았습니다." 목욕탕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왕도에 있는 알레그로의 집과는 달리 수도 시설이 되있지 않은 내 집에서 하루에 한 번 씻는다는 것이 사치일 수도 있지만,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나로써는 어릴 적 부터의 이 습관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누나의 꾸중속에 따뜻한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에도 떨면서 샤워를 하루 두 번씩 꼭꼭 했으니까. 어느정도 커서야 주변에서 각종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또 부모 없는 아이가 받는 갖은 선입견같은 것을 느끼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최대한 물을 더럽히지 않으며, 아끼며 씻고 나니 역시나 욕조에 물이 남았다. 나와 보니 블레탈은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블레탈, 네 차례야." "예." 역시 저 높임말은 어떻게 안 되는군.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은 후 아래로 내려와 벽난로 앞에서 머리를 말렸다. 그렇게 한 참을 말린 후 대충 머리손질을 하고 있을 때 욕실에서 블레탈이 나왔다. 긴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은 블레탈은 천천히 내 가까이 와서 앉아 벽난로 앞에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벽난로의 불빛에 자수정을 갈아 실로 삼은 듯한 블레탈의 머리카락이 색색으로 반짝거린다. "라인님. 오늘 왕도에 다녀왔으면 합니다만." "왕도에?" "예." 왠 일이지? 블레탈이 스스로 왕도에 가려는 적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왕도에 볼일이 있지. "그러면 가는 김에 나도 같이 가자. 가서 넌 네 일을 보고 난 내 일을 하면 되겠지. 그런데 돈은 있어?"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역시. 생각해 보니 피에나 흄, 샘이나 블레탈에게 돈을 준 기억이 없다.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은 줬어야 하는데. 내가 저들을 샀다지만 여태껏 작은 돈도 쥐어주지 않았다니. 아침을 먹고 오랜만에 나갈 채비를 한 뒤 블레탈과 함께 집을 나섰다. 생각해 보니 내가 무심했던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블레탈은 그렇다 쳐도 피에, 흄, 샘 할아버지는 내 집에 온 이후 한 번도 왕도에 가보지도 못하고 집안일만 도맡아 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블레탈과 말을 타고 가는 와중에 블레탈이 물어왔다. "그동안 피에, 흄, 샘에게 무심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해 준 것도 없이 부려먹기만 했던 것 같아서."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요. 라인님은 과분할 정도로 저들에게 잘 대해 주시니까요." "과분할 정도?" "하급 노예에게 주인이 쓰는 욕실을 쓰게 해 주고, 배불리 먹게 해 주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또 침대가 있는 방을 내어주는 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셋을 경멸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에 대한 비난? 하지만 올려본 블레탈의 얼굴은 진지하게 날 바라보고 있어서 난 블레탈이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들도 감사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블레탈이 모는 말에 타고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왕도에 왔을 때는 종탑에서 종이 열 번을 치고 있을 때였다. 성문을 통과해 사람과 마차가 오가는 번화가 쪽으로 왔을 때, 난 말에서 내렸다. "난 이 쯤에서 가겠어. 그리고..." 허리춤에서 얼마 정도의 돈이 담긴 주머니를 꺼내 블레탈에게 내밀었다. 블레탈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더니 곧 주머니를 손으로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난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갈 테니까 넌 일을 본 다음에 그냥 집으로 가."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상회로 향했다. 이 왕도에서 엄청난 재력을 자랑하는 상회인 만큼 -알레그로의 말에 의하면-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마차의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에서 왠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롤 라인이 아닌가!" 고개를 돌려보니 마차의 창 너머로 금발의 청년이 환히 웃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코텔 훼아라스님." "아침이라고 하기엔 어중간하지 않은가? 어디에 가는 길인가?" "하인 상회에 가는 길입니다." "태워다 주겠네. 만난 김에 이야기도 하고 싶으니 마차 안으로 들어오게."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마차의 뒤에 매달려 있던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었고, 난 별 수 없이 마차안으로 들어갔다. 넓고 화려한 마차 안에는 화려한 황금색의 문양이 수놓아진 검은 옷을 입은 훼아라스가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팍 위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보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는 그 책을 들어 내게 건내주었다. "<소데른의 별미>라는 책이지." "요리에 취미가 있으십니까?" 훼아라스는 푸른 눈을 살짝 희며 웃었다. "내가 요리를 할 리가 없지 않나. 난 이 곳 저 곳 여행하는게 취미라 조금만 괜찮다 싶은 게 눈에 띄면 각 나라나 명소에 대한 책들은 닥치는 대로 읽어 버리지." 과연 훼아라스가 준 책에는 빼곡히 각 음식점이 자랑하는 별미와 함께 그 것에 대한 설명들이 적혀 있었다.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음식에 대한 사진이나 그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나 할까. 책을 뒤적여 보는 내게 훼아라스가 물어왔다. "여행을 다닌 적이 있나?" "아니요."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로 졸업여행을 갔긴 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아니니까. 분명 간 적이 있다고 하면 훼아라스가 이것 저것을 물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자네가 살던 곳에 대해서나 이야기 해 주게." "살던 곳...말입니까?" "왕도 가까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 그 전까지는 어디 다른 곳에 살았을 텐데 그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 자네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져 생긴 존재가 아닌 이상 어딘가에 살았겠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훼아라스야 농으로 말했겠지만 훼아라스 말 대로 난 '갑자기 뚝 떨어져 생긴' 이계의 인간이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난 긴장하면서도 농담조로 맞받아칠 수 밖에 없었다. "저는 뚝 떨어진 인간인 듯 합니다. 어쩌면 지금 떠 있는 태양이 제가 살던 곳인지도 모르죠." "하하하. 그렇게 안 봤는데 이런 농담을 하다니." 그러면서 큭큭대던 훼아라스는 더 이상 내게 그에 관해선 묻지않았고 난 잔뜩 굳은 몸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경우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었는데. 출신지라. "그런데 기분은 괜찮나?" 훼아라스의 말에 풀렸던 몸이 다른 의미로 굳었다. "그 날 자네가 말없이 사라져서 걱정했었네. 제하 알레그로와 자네가 같이 저택을 나서는 걸 보았다는 하인의 말에 그제야 조금 안심하긴 했지만." "......" "기껏 사람을 초대해 놓고 험한 일을 당하게 하다니. 미안하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키에른. 그 자는 본래 중인들과는 어울리기 싫어하는데다 명문 카레스가의 장남인 만큼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모임에 중인들이 끼는 것을 불만스레 생각한다네. 나나 파하스와는 생각이 많이 틀린 친구라 사실 나나 파하스가 모임을 주최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갑자기 모임에 나타나서 자네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훼아라스가 '녀석은 원래 그런 녀석이니 참아라'라는 어조로 위로하듯 얘기하긴 하지만, 알레그로처럼 나 외의 중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다. 하필이면 그 많은 중인 중에 내가 그 꼴을 당한 이유는 내가 갖은 소문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고 또 힘이 없기 때문이겠지. 목구멍까지 치미는 욕지꺼리를 애써 삼키고 있는데 훼아라스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좀 기분이 나아보이니 다행이군. 헌데 상회에는 무슨 일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자문을 구하려고 합니다." 훼아라스는 흥미가 동한다는 듯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았다. "엘위론에서 살게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 제가 할 일을 찾지 못해 그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해야 돈을 벌 것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는 자네는 상당한 부자라고 알고 있네만."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제 조부님께서 물려주인 유산일 뿐 제 능력으로 얻어진 게 아니지요. 그래서 저도 뭔가 할까 합니다." "유산일 뿐 능력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라... 역시 중인들은 우리 귀족들과는 틀린 것 같군. 한결같이 능력과 노력을 강조하니. 하긴 중인들은 어릴 때 부터 무언가를 배우느라 바쁘고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움직이지. 능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무시당하고 말이야. 내가 중인들처럼 산다면 하루도 못 버텨 미쳐버리고 말걸세." 그러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내 젓는 훼아라스는 정말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잘 모르겠지만 훼아라스의 말대로라면 중인들은 능력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엘리트들이란 말일까. 생각해 보니 난 중인이 됐으면서도 중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할 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 한 건가? 조금이라도 생각해 둔 것은 없나?" "아직까진 뭘 해야 할 지 감을 못 잡겠습니다." "내가 자네라면 그냥 마음 놓고 이 곳 저 곳 여행하며 편히 지낼텐데 말이야. 하인상회에 자문을 구하러 간다는 것은 그곳에 자네 돈을 투자하거나 예치해 두었다는 소리겠지?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매달 재산이 불어날 터인데 굳이 일을 하겠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군." "남들에게 백수로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긴 사교계의 소문이란 건 사람을 정말 괴롭게 하는 것이지." 역시 훼아라스도 나에 대한 악평을 알고 있는 건가. 알레그로에게 전해들어 막연히 알고 있긴 하지만 알레그로 외의 중인들과 제대로 이야기 한 적이 없는 나로써는(하이드나 다이엔 또한 중인이지만 그들은 정상이 아니니까) 아직 그 악평이란 것에 대한 실감은 하지 못하겠다. 분명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면 이상이었지 덜하지는 않겠지. 명문 귀족이라는 키에른이 사람들 앞에서 날 대놓고 모욕할 정도의 악평일 테니까.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하든 장사를 하겠군." 장사? "자네가 기사를 할 정도로 체력이 좋아 보이지는 않고, 또 관료가 되자니 준비하기 위해 사학에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나이가 많지 않나. 관료가 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왕도의 사학을 졸업해야 하니까 말이야. 또한 자네 같은 사람이 누구의 밑에서 일을 하는 것도 무리겠고..." 나 같은 사람이라니? "벌써 다 왔군." 훼아라스가 창 밖을 보며 말하자 마차는 멈춰섰다. 여전히 머릿속이 싱숭생숭한 가운데 훼아라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도울 일이 있다면 코텔가로 연락하게." 마차에서 내리니 '하인상회'바로 앞이였다. 내가 내리자 마자 곧 출발하는 마차를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등을 돌려 상회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 직원의 안내를 받아 전에 들어왔던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난 훼아라스의 말뜻을 곰곰히 생각했다. 누구의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은 무리다. 역시 내 재산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내 생각이 억측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해. 중인인 내가 누구를 섬겨봤자 귀족이나 좀 잘난 중인일텐데 수하가 된 내가 엄청난 재산을 가진 부자라면? 누구라도 욕심이 나지 않을 리가 없지. 특히 난 이곳에서 겨우 열일곱 살 밖에 안 된 친지 하나 없는 중인소년에 불과해. 또한 알레그로가 말했었지. 난 장식품이라고. 부하와 친구의 중간후보라고 말이야. 알레그로의 말을 짚어보면 결국은 돈 문제다. 내가 돈이 많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알레그로가 그런 말들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내게 늘어놓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또 내게 힘을 키우라고 은연중에 종용한 이유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내가 불쌍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제 또래의 녀석이 감당 못할 재산을 가진 채 아무 상황도 파악 못하고 바보처럼 있던 게 불쌍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확실히 알레그로가 날 만난 그 첫날밤에 그러한 것들을 설명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바보처럼 있었을테니까. 멍청하게 이 곳에서 내가 처한 상황도 파악 못 한 채. 좋아. 그렇다면 확실히 훼아라스의 말대로 난 이곳에서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 평범한 회사원처럼 지낼 수 없다는 소리다. 귀족가의 가신이 되는 것이나 중인이 운영하는 상회나 회사 같은곳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소리. 특히 가신은 더더욱이나 안 된다. 그 귀족가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소리니까, 내 주군이 된 사람이 내 재산에 욕심을 낸다면 손 쓸 방도가 없어진다. 하지만 장사라니. 난 겨울만 지나면 이제 겨우 고 이가 될 가난한 사내아이일 뿐이었다. 밤일을 한 지 근 이십년, 젊음이 시들어 가는 누나가 한탄조로 가게를 내고 싶다는 말을 한 번씩 듣기는 했어도 장사에는 문외한일 수 밖에 없다. 또한 난 잘 모르겠지만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입지 선정도 잘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손님을 확보하느냐도 중요하다. 게다가 주위에 비슷한 계통에 종사하는 경쟁상대가 있으면 영역다툼도 치열하다고 들었다.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참고 있는데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전에 만났던 외알 안경의 남자. 하인상회의 회계 사무장이라던 조아라 머니가 들어왔다.(이름이 하도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다.) "거의 일 주일 만에 또 뵙는 군요, 캐롤라인씨." 조아라 머니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조아라 머니씨."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조부님의 유산은 확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혹시 뭔가 걸리는 일이라도...?"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뭔가 문의할 일이 있어서..." "흠? 무슨 일입니까?" 난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외알안경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인상회는 엘위론에서 첫째가는 상회라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돈을 다루는 것에 대해선 매우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이거, 이거 저희 상회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전 지금 조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가지고 있지만 다룰 능력이 없어 그저 하인상회에 예치해 두고 있는 실정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큰 재산이라도 계속 쓰다보면 줄어들 게 뻔한 이치. 해서 저는 제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하인상회의 회계 사무장이신 조아라 머니씨의 고견을 듣고 싶어서 찾아 온 것입니다." 내 말에 조아라 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두 손을 깍지 꼈다 폈다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장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사? 너무 범위가 넓군요. 장사에도 여러가지가 있어서 여러 가지 요식업이나 의류전문, 땅이나 건물을 파는 것이나 노예나 동물을 파는 것 등 그 종류만도 제가 헤아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저희 '하인상회'가 '상회'라고 불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요. 저희는 수 만가지의 물품들을 관리하고 사고, 되파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의견을 구하러 온 겁니다." 사실 올 때는 막연하게 조언을 구하러 온 거지만 훼아라스의 말을 듣고 나서 이나마 범위가 줄어 들었달까. 한참을 끙끙대던 조아라 머니는 벌떡 일어서서 응접실에 딸린 작은 문으로 들어가더니 두터운 서류 다발을 들고 나왔다. 그는 그것을 펼치더니 내게 말했다. "이건 왕도내의 상점들에 대한 자료들입니다. 왕도는 생산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소비계층이 훨씬 더 많은 곳이지요. 외곽지역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자들 외엔 생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연히 수많은 물자를 각 지역이나 외국의 물품을 들여오는 교역도시를 통해 왕도로 운반해야 하는데, 그 이득을 얻기 위해 몰려든 상인은 물론이고 왕도내에 정착해 그 물자를 소비자에게 직접파는 상인까지. 그야말로 엘위론은 상인들이 우글대는 곳입니다. 경쟁이 치열하지요."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충 한 번 훑어보시지요." 조아라 머니의 말대로 난 그 자료란 것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빼곡히 그 상점의 지대가 대략 얼마 정도인지, 지명도와 그 상점이 취급하는 것 등에 대해 써져 있었는데 음식점이나 여관만 해도 몇 페이지가 넘어갔다. 머리가 어지러워 애써 자세히 훑어보려고 애쓰다가 결국 자료에서 눈을 때고 말았다. "저희 상회에 가입된 상점들만도 대략 이 정도 입니다." "많군요." "다들 치열하게 살아남느라 얻은 저마다의 노하우를 갖춘 노련한 장사꾼들이지요. 솔직히 말하면 '장사'를 권하고 싶지 않은 게 제 생각입니다. 차라리 투자를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투자요?" "저희 상회는 단순한 장사 외에 여러가지 일들을 하고 있지요. 그린츠 광산의 채굴부터 시작해서 귀족전용의 카지노 운영, 남쪽 히츠그란 해의 호화 유람선을 이용한 관광업까지. 요즘 들어서도 꽤 여러가지를 추진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에 투자를 하시면..." 그러면서 날 설득하는 조아라 머니가 말하는 '투자'란 것은 내가 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상회가 무슨 일을 하려는 데 당장 돈이 없다면 투자가들을 모은다. 만약 자본이 100이라고 치고 내가 30의 자본을 내 돈으로 댄다면 그 이익의 삼할. 즉 삼십퍼센트는 내가 얻게 되는 것이다.(물론 이건 초기의 투자 조건에 따라 틀려질 수도 있다) 그 만큼 그 일에 대해서 발언권을 가지게 되는데, 만약 그 사업이 망하게 되면 당연히 내가 투자한 돈을 되찾을 수는 없다. 역시 장사꾼은 장사꾼인가. 진실되게 도움을 청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알려줄 것이라고 조금이나마 생각했던 내가 멍청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궁리하다가 자기 상회에 도움이 되는'투자'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다니. 결국 날 수많은 하인 상회의 자금원 중 하나로 삼고 싶다는 소리니까. 엄청난 액수의 내 돈을 하인상회에 이미 예치해 두고 있는 데도 모자란다는 것일까. 절로 새어나오는 비웃음을 애써 참으며 난 냉랭하게 답했다. "아니요. 돈을 다루는 것에 문외한인 제가 함부로 거액의 돈을 투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상회에서는 그 분야에 뛰어난 전문가들이 즐비하니까요."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앞이 불투명하니까 상회의 자금을 쓰지 않고 투자가들의 돈을 빌리려 하는 거겠지. 내가 열 일곱살 밖에 안 되었다지만 그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어. "그렇다면 굳이 장사를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경쟁자가 우글우글한데도?" "아직 뭘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입지가 좋은 왕도내의 건물이나 땅을 알아봤으면 합니다만." "별 수 없군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조아라 머니는 더이상 나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알았습니다'하고 말하곤 또다시 작은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이번에는 돌돌 말린 종이를 들고 나왔는데 그것을 펴니 엘위론 시내가 그려진 지도가 나왔다. 그는 잠시 지도를 훑어보더니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날 바라보았다. "지금 팔고 있는 가게나 땅은 대충 이 정도인데 사실 좋은 조건은 아닙니다. 좋은 위치에 있는 가게나 땅을 그 주인이 팔리가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지요. 그래도 이 쪽은 그나마 사람들이 꽤 오가기 때문에 혹시 다음에 이 곳에 상점이 들어서면 납품을 할까 보던 곳들입니다." "게 중 제일 좋은 곳이 어떤 곳인 것 같습니까." 조아라 머니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하얀 퐁티냐 가 32 라고 써 붙인 장소를 가리켰다. 그 곳은 대로(왕도의 성문부터 왕궁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곳으로 흔히들 대로라고 한다. 이곳이 왕도의 중심축인 듯 하다.) 와는 몇 골목 떨어진 곳이었다. "마부를 시켜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가보시겠습니까?" 난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하인상회의 회계 사무장께서 괜찮은 곳이라고 할 정도면 굳이 볼 필요도 없겠지요. " 그리고 어차피 잘 모르는 내가 가봤자다. 게다가 하인상회의 큰 고객인 내가 이 정도로 신뢰감을 표시하는데 별 볼일 없는 건물을 소개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난 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람의 심리는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니까. 내 생각대로인지 조아라 머니는 내 말에 머뭇거리다가 손가락을 옮겨 다른 곳을 두드리며 웃었다. "생각해 보니 하얀 퐁티냐가 건물보다는 이 곳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이요?" 그것은 대로건너에 있는 요엔 가 2 건물이었다. "예. 대로와 가깝지요? 건물은 낡고 오래되었지만 캐롤 라인씨의 재력이라면 충분히 새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겁니다. " "그렇다면 그 곳이 좋겠군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조아라 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아라 머니씨가 제 명의로 그 건물을 사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돈은?" "어차피 제 재산은 하인상회에 예치해 두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돈을 함부로 빼서 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지만 조아라 머니는 웃고 있었다.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상인은 이윤을 남기는 데 매우 능숙하고 한 상회의 회계 사무장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마 나 따위가 건물을 사는 액수보다도 훨씬 더 낮은 가격으로 건물을 매매할 수 있겠지. 그 가운데 조아라 머니가 이윤을 챙긴다고 하더라도 내가 건물을 매매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을 거야. 나는 사실 그 건물 전체를 조아라 머니에게 맡긴거나 다름없었다. 조아라 머니도 그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가 내 돈으로 그 건물을 사고 인부를 고용해 건물을 새로 짓든, 수리를 하든 그가 내게 건물을 넘길 때 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블레탈은 가만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하얗다고만 하기엔 미묘한 상아빛을 띄는 손은 연필을 중간에 낀 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팔은 진지하게 하얀 종이를 응시하는 검은색의 눈동자와 어울려 지독히 정적이고 우아했다. 라인님은 아는 걸까? 그는 평소에도 잔잔한 기품을 뿜으며 청량한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매혹시키지만 그림을 그릴 때면 더하다는 걸. 그림을 그릴 때만은 창백하고 지친 듯한 안색이 생기 있는 은은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 손을 뻗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진다는 걸. 아름답다. 어쩌고 보면 평범한 외모일 수 있는데도...가지고 싶다. 물론 라인님이 자신의 것이 되기엔 아직 무리인 것 같지만, 젠장. 블레탈은 몇 일전의 일을 생각하며 갑자기 찌푸려드는 눈을 애써 바로 폈다. 얼떨결에 말해버리긴 했지만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말했으면 뭔가 자신이 예상하는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난데없이 ‘친구’라니. 허탈함과 어이없음. 나중에는 화까지 났다.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다 못 해 에스트라님을 꼬드겨서 기껏 찾아갔건만 그의 방에는 그의 친구라는 자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고. 하지만 곧 물기어린 눈으로 너무나 기쁘게 웃는 라인님의 모습에 뭐랄까...이대로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그리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자신의 주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했던 것만큼 쉽지 않을 거라고. “블레탈, 지우개 좀 줘.” 듣기 좋은 나직한 미성에 블레탈은 상념을 떨치고 지우개를 들어 라인에게 주었다. 그러자 라인은 그것을 받아들더니 약간 미안한 듯 물었다. “지루하지? 그냥 집에 가 있을래?” “아닙니다.” 잡일은 어차피 얼빵한 한 놈과 조금 눈치 있는 한 녀석, 그리고 샘 노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란 눈을 잔뜩 가져와 끓여두는 일 뿐이니까. 게다가 이런 곳에서 산짐승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자신의 주인은 단번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 말에 라인은 훗하고 웃었다.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책이라도 들고 오자. 아니면...음...블레탈은 뭐 취미 같은 거 없어?” 취미라.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카바예란일 때는 언제나 하는 건 칼을 휘두르는 것이었고 상급노예로 격하된 뒤에는 그저 하는 것이라고는 술을 마시고, 반반한 다른 노예들과 몸을 섞는 것 정도? 언제나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때와는 달리 부드러운 옷에 고급 향유, 풍족한 음식이 주어졌을 때는 좋다고 느꼈지만, 굉장히 지루했다. 하지만 상급노예에게 검을 주거나 책 같은 것을 던져 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없는 모양이네. 뭐, 취미란 만들면 되니까. 취미는 즐기는 거거든.”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라인님의 취미입니까.” “아, 응... 그래. 지금은 단순히 취미일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라인의 눈은 순간 굉장히 흔들려서 블레탈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순한 취미로 치기엔 당신은 너무나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다고. 그리고 블레탈은 또다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바로 어제의 일을. ‘이건...굉장히 뛰어나군.’ 그의 주인은 그림을 그리고 나면 항상 노예들에게 태우라고 말했다. 사실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블레탈은 그 그림들 중 꼭 몇 장을 차지하는 여자를 볼 때 마다 짜증이 일어 오히려 후련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새벽에 일찍 깨어 거실로 갔을 때 샘 노인이, 태웠어야 하는 그림을 주섬주섬 모으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샘 노인은 그날 태웠어야 할 그림뿐만 아니라 이미 사라져야 했을 그림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솔직히 참으로 아까운 그림 아니오. 난 이런 그림 볼 줄도 모르는 무지렁이인 늙은 노예지만 굉장히 잘 그렸다고 생각 돼서...’ 당장 벽난로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불빛에 아른대며 비치는 그림속의 선들은 너무나 정성스레 가닥가닥 모여들어 한 폭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서 블레탈은 차마 그림들을 던져버릴 수 없었다. 젠장 맞게도 항상 짜증스러웠던 ‘그 여자’를 그린 그림 또한 너무도 생생히 빛나고 있었기에... ‘이 그림, 제가 가져갑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림을 샘노인에게 뺏어들고 한 시간 여 쯤 고민을 한 끝에 블레탈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짜증스러운 여자 그림이 몇 장 끼어있긴 하지만 라인님이 정성들여 그린 그림이다. 왕도의 화방에 가져가 주인의 이름으로 팔면 굳이 태워서 처리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그 돈으로 라인님을 위해 뭔가라도 산다면... 그런 마음으로 왕도까지 가서 화방을 찾아서 그림을 보였는데, 예상했던 것 보다 반응이 대단했다. ‘이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가 엘위론에 있었다니. 당장 사겠네.’ 그 곳에 있던 조수로 보이는 사람에게 약간의 돈을 받고 그림을 팔려는 데 끼어든 나이든 여자는 날카롭고 깐깐한 두 눈을 빛내며 그림을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조수를 큰 목소리로 꾸짖더니 왠지 열기가 담긴 눈으로 블레탈을 바라보았다. ‘이 그림 누가 그렸나?’ ‘캐롤 라인. 제 주인님입니다.’ ‘캐롤 라인?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이런 실력으로 <화예대전>에 참가한 적이 없다니! 아무튼 대단하군!’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의 주인은 생각보다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언제나 왜 혼자서 그림이나 그리며 지내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그림이 ‘그림이나’정도로 취급 될 것이 아니었다니. 그것은 두둑한 금화 주머니를 하나 넘겨받고서야 확신에 가까워졌다. 그러고 보니 그 것을 라인님에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아니면 지금 너도 그림 그릴래?” 오늘은 유달리 딴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것 같다. 블레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라인을 바라보았다. 라인은 자신이 쥐고 있던 연필과 단단한 받침대에 놓인 종이 한 장을 자신에게 내밀며 창백하게 웃고 있었다. “어려울 건 없어. 받아.” 블레탈은 별 수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항상 라인님의 손에 들린 것들이 자신에게 있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라인은 그저 빙긋이 웃어 보이고는 다시 그림에 몰입할 뿐이었다. 예의 그림을 그릴 때만 보이는 열기를 눈에 띄우며.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그림일은...다음에 얘기해도 되겠지.’ 블레탈은 천천히 연필을 오른손에 쥐고 종이위에 어색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툴기 짝이 없어서 영 좋은 태가 안났지만 곧 블레탈도 라인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에 바닥과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휘말려 마치 안개처럼 둘의 주변으로 떨어졌지만 두 소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사각대는 두 자루의 연필소리만 들릴 뿐. 희미하게 비명을 지르는 불빛 속에 야수의 것 같은 황금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한 사내의 등허리를 향하고 있었다. “사, 살려주십쇼! 사, 살려줘!” 눈동자가 슬쩍 희어지며 장난기를 머금은 순간 날카로운 창이 사내의 종아리를 꿰뚫었다. “으아악!” 몸을 경련하며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콧물 눈물을 흘리는 사내. 그것을 보며 바닥에 널부러진 남자와 여자들은 몸을 덜덜 떨었다. 방금 전까지 약에 취해 난잡한 성관계를 맺으며 극락을 오갔었는데 순식간에 이곳은 그들에게 지옥이 되어 버렸다. 자신 같은 평민, 그중에서도 버러지로 취급되는 자신 같은 뒷골목태생들이 중인 소년, 소녀들의 눈에 들어 그들과 함께 밤놀이를 즐기게 되었을 때는 이게 왠 떡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들은 지루하다며 자신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를 칼로 배어내고 채찍을 들어 등허리를 치고 발톱과 손톱을 집게로 빼기까지... 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잘 생긴 소년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하얗지만 다부진 오른손에 잡힌 창은 이내 사내의 손등을 통과해 다른 쪽 종아리를 꽤 뚫었다. 그리고 하는 말. “기절하지 않아?” 소년이 무자비한 손놀림으로 창을 빼어든 순간 남자는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낄낄대며 보던 한 소녀가 말했다. “내가 보는 눈이 있거든. 자꾸 기절하면 재미없잖아?" “어쭈? 너만 보는 눈 있냐? 대장 그러지 말고 내가 구해 온 놈 다리 하나 불러봐.” 질겅질겅 육포를 씹으며 옆에 있던 소년이 휘적휘적 한쪽으로 가서는 오들오들 떠는 한 남자아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대장쪽으로 밀어버렸다. 안 가려고 버둥대던 남자아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장이라 불리는 소년의 발아래 넘어져 버렸다. 남자아이는 급히 기어 소년의 발을 붙잡고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나리! 살려주세요!” 덜덜 온몸이 떨리고 무서웠지만 남자아이는 계속 애원했다. 어차피 도망쳐봤자 잡혀서 목이 졸리고 다리가 잘릴 것이니 이렇게 애원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이는 깨닫고 있었다. 여기서 무사할 수 없을 거라는 걸. 머릿속에 집에 앓아눕고 있는 엄마가 떠올라 더더욱 눈물이 났다. 엄마, 엄마 무서워. 엄마 말 대로 멀리 나가 놀지 않는 건데. 그 순간 피가 솟구쳤다. “아아아악!” 가녀린 아이의 비명은 날카롭게 집안을 울렸다.툭 바닥에 떨어진 작은 귀가 피에 물들여 생생하게 빛이 났다. 대장, 아니 하이드는 그것을 집어 들더니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잘 생긴 얼굴에 잔혹함과 장난기를 동시에 담은 채 아이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먹어.” “!” “먹지 않으면 넌 죽거든.” 요사한 황금빛 눈동자는 매혹적인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튀어나오는 비명을 애써 누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귀의 출혈로 머리가 빙빙 돌고 아픔으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이는 벌벌 떨리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그러자 하이드의 손이 우악스레 작은 귀를 아이의 입속에 처넣었다. “욱!”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눈앞에는 악마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는 이빨을 움직여 입안의 것을 씹기 시작했다. 오드득 오드득. 연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아이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이드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얼굴에 눈물이 맺히고 고통어린 빛이 감돌 때 마다 아래에서 열기가 치민다. 라인은 저런 버러지보다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데, 울면 어떨까. 내 밑에서 울면... 라인과 저 아이를 겹치며 상상하니 치미는 참을 수 없는 열기. 하이드는 소스라치는 아이의 중심을 잡고는 말했다. “토하면 죽인다.” 이윽고 하이드의 손이 움직였다. 긴 손가락이 부드럽게 그곳을 감싸 쥐고 부빌 때 마다 작은 것이 움찔움찔 떨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아이는 잔인한 소년의 손에 부끄러운 곳이 희롱당하는 치욕감과 자신의 귀를 씹는데 나오는 토기를 간신히 참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와중 본능적으로 나오는 흥분감에 아이는 더 몸을 떨었다. “윽...읍...” “자, 그만 씹고 삼켜. 네 신음소리를 들려줘야지.” 하이드는 그것을 잔인하게 즐기며 웃었다. 아이의 눈은 이미 두려움과 흥분, 부끄러움으로 풀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신의 귀를 억지로 꿀꺽 삼키고 작은 입을 꽉 다물었다. 치솟는 토끼를 참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아이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입안의 것을 뱉으며 토하고 말았다. “젠장.” “푸하하!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어!” 덕지덕지 신내 나는 음식물이 몸에 들러붙어 잔뜩 불쾌해진 하이드는 야수 같은 눈으로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이제 숫제 오줌까지 싸며 꺼억꺼억 울었다. “죽인댔지.” 하이드는 짜증을 가득 담아 아이의 작은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 아이는 피가 퐁퐁 솟는 작은 몸을 파닥이며 경련하더니 곧 손을 떨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종아리가 찔려 피를 흘리던 사내는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하이드의 패거리는 마냥 좋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하이드는 잔뜩 흥이 식어 짜증 섞인 몸짓으로 창을 한 구석에다가 던져버렸다. 창은 무섭도록 정확한 속도로 날아가 벽에 박혔다. 그리고 하이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어디 가는 거야 대장?” 막 여자와의 정사를 끝낸 바윈이 나른한 얼굴을 쳐들며 묻자 낄낄대던 소녀 메샤가 장난스레 웃었다. “난 알 것 같애. 그 ‘도련님’만나러 가는 거지?” “에엑? 그 반짝반짝 빛나던 녀석? 혹시 한 동안 대장 기분이 엉망이었던 이유가...” “그래. 이제야 알겠냐, 얼간아?” “하지만 대장! 그만 두는 게 어때? 그 녀석은 대장이랑 전혀 어울리는 부류가 아니라고.” “맞아, 그 이후로 한 번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잖아?” 그렇지만 그런 소리들은 하이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들어 있던 그 때 들려온 아름다운 목소리, 그 잔잔하고 기품 있던 목소리가 자신을 깨웠다. 두근, 두근, 두근 떨리는 심장고동에 다이엔을 억지로 밀치고 나와서 본 그는 질척이던 자신의 공간에 빛을 주는 것 처럼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 약해보이지만 약하지 않은 그 당당함은, 자신이 이제껏 보지 못한 종류의 것. 게다가 자신을 보고 웃어 주었을 때 그 느낌이란. 자신에게 그렇게 웃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 뿐, 라인 뿐. 그래서 다시 보고 싶어서 억지로 다이엔을 밀치고 기다렸는데. 그는 그 후로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뭐 괜찮아.’ 하이드는 황금빛 눈동자를 요사하게 빛내며 웃었다. 역시 가짜를 가지고 놀며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내 성미가 아니야. 라인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가면 되는 거지. 아무래도 추운 날씨인데 요 몇 일간은 한층 더 추운 것 같다. 그야말로 살을 애는 듯한 추위라고나 할까. 모피코트를 꽁꽁 두르고 집안에서 장갑까지 꼈는데도 스며드는 냉랭한 한기에, 저절로 몸이 떨리는 것을 참으며 손을 주물렀다. 너무 추워서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까닭이다.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앞날이 암담하군. "그래도 <여왕의 심술>만 지나가면 날이 풀릴 겁니다." "<여왕의 심술>?"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이번에 장만했다) 샘 할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샘 할아버지는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은 채로 긴 실을 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 막바지에 이르면 갑자기 날씨가 추워질 때가 있지요. 그게 끝나면 서서히 날씨가 따뜻해지고 곧 봄이 옵니다." "그 소리는 곧 봄이 온다는 말이로군." "허허. 그렇지요." 샘은 그러면서 실을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돌리길 멈추지 않았다. 주름이 쭈글 쭈글한 손에는 번들번들한 것이 발려있었는데 아마 샘이 만드는 심지를 한 데 뭉치는 데 필요한 것 같다. 봄이라. “서울에도 봄이 곧 오려나...” “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 겨울은 추운 단칸방에서 보내기엔 너무나 혹독한 계절이었으니까. 게다가 누나나 나에겐 난방을 위해 함부로 보일러를 켤 정도의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저 두껍디 두꺼운 이불을 몇 겹씩이나 깔아두고 그것에 의지해 겨울을 보냈을 뿐. 뼛속까지 시린 한기는 정신력으로만 버티기엔 너무나 괴로운 것이어서 누나나 나는 겨울을 제일 싫어했었다. 그것도 이젠 산타 할아버지가 누나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을 주겠다고 했으니 나아질까. 어차피 손이 떨려서 그림을 그리기엔 무리라는 생각에 연필과 화판을 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다 곧 지루해져 일어났다. 책이라도 읽어야겠다.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고 느껴 이것저것 읽어보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많으니까. 이층 서재로 가서 책장에 꼽힌 책 한권을 빼어드는데 밑이 뭔가 소란스러워졌다. 책을 들고 계단참에서 내려보니 낯선 불청객하나가 매우 당당하게 집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피에는 문을 닫고 있고 샘은 일어서서 구부정한 허리를 숙이며 불청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강렬한 붉은 색의 옷이라던지 얼핏 보이는 갈색 머리라던지 터무니 없이 당당하기 짝이 없는 태도가 왠지 익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불청객이 순간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의 시니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손님이 왔으면 주인이 맞는 게 도리 아냐?" "여기까진 왠 일이지?" "그런 걸 묻기 전에 그 우스꽝스런 꼴이나 어떻게 하지 그래." 그러고는 자연스레 외투를 벗어 멀뚱히 서 있는 흄에게 넘기더니 식당으로 들어가버린다. 우스꽝스럽다니. 확실히 옷을 몇 겹이나 껴 입은 것으로도 모자라 모피코트로 몸을 싸매고 장갑에 모자에 춥다고 유난을 떨고 있는 내 모습이 추할 법도 하지만. 은근히 열받는 것을 참으며 녀석에게 더 이상 비웃음을 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방으로 들어가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알레그로는 식당 의자를 빼어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다. 처음 봤을 때 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이 녀석 진짜 붉은 색 광이로군. 집도 그랬지만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지금까지 쭉 붉은 색 옷들만 입고 있다니. "붉은 색, 붉은 색. 질리지도 않는 건가." 비꼬며 중얼거리듯 말하니 알레그로가 비웃었다. "사람인지 털가죽 덩어린지 구분이 안 되는 꼬락서니 보단 낫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묻는 거지만 여긴 무슨 일이지?" 차를 준비하기 위해 우유를 중탕시키며 묻는데 답이 없었다. 시니컬하게 한 마디 해야 할 텐데. 의아해져 고개를 돌리니 알레그로가 흥미롭다는 듯 한 쪽을 보고 있다. 시선을 따라가니 블레탈이 눈이 든 나무통을 들고 오고있다. "흐응..." 관찰하듯 블레탈을 바라보는 알레그로. 하필이면 이 때 오다니. 제하 알레그로는 중인이니까 에스트라가 블레탈을 물건 취급 한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상처를 줄 수도 있어. 저 녀석의 베베 꼬인듯한 성격에 충분해. 날 만난 첫날에도 날 계단에서 밀어뜨려 떨어트릴 뻔 한 전적이 있으니까. 애써 안색을 가다듬고 자연스레 알레그로와 블레탈 사이에 끼어들어 시선을 가리며 빼앗듯 통을 받아들었다. 윽. 생각보다 엄청 무거운데. "그건 제가..." "아니, 그리고 손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손님이 가실 때 까지 식당엔 들어오지 않도록 해." 강하게 블레탈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일순간 그 눈동자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그 기세에 놀랐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아름다운 보라빛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휙 나가버리는 블레탈. 설마 쫓아내듯 보내버려 화가 난 건 아니겠지. 걱정이 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으니... 내가 블레탈을 애써 쫓아낸 가장 큰 이유. 슬그머니 알레그로를 바라보니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다. 젠장. "그런 거였군." "그런 거 라니?" 애써 무덤덤하게 되물었지만 가슴이 덜컹댄다. 이럴 줄 알았어. 저 머리 좋은 녀석이 블레탈을 보게 되면 에스트라가 블레탈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다는 걸 단박에 알아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블레탈을 쫓아냈는데... 이제 저 녀석이 그걸 어떻게 써 먹든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 내가 부탁한다고 해서 그걸 비밀로 해 줄까? 암담함에 머리가 어지럽다. 그걸 귀족들이 알아버리게 된다면...그 때 날아드는 난데없는 소리. "저런 애인을 두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뭐? 갑자기 뒷통수를 치는 것 같은 말에 멍하니 알레그로를 본 것 같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알레그로가 눈쌀을 찌푸렸다. "그런 등신같은 표정 짓지말지?" "너..." "감추려고 한다면 저런 비싼 옷들을 입히진 말았어야지. 하긴 여기는 외지라서 볼 사람도 없겠군."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조리대쪽으로 가 찬장에서 식기와 찻가루, 꿀을 내렸다. 하. 애인이라니... 황당하지만 어쨌든 에스트라가 블레탈을 짝사랑한다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한 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귀족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잡일을 하고 있다니.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보는 군." 확연하게 느껴지는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 마치 내가 돈을 물쓰듯 쓰는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 정도로 보는듯한 시선이라니. 매우 억울하지만 별 수 없다. 내가아닌 에스트라가 사 줬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쨌든 이렇게 넘어간 건 다행이지만 나와 블레탈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오해를 사게 되었으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여자친구 한 번 사겨본 적없는 내가 에스트라 덕에 갖은 오해를 사게 되는 군. "그런데 네 애인은 경호를 위해 산 노예들 중 하나인가? 나머지 는 어디 있지?" "경호를 위해 사다니?" "아까 그 녀석의 허리춤에 검이 매달려 있었잖아. 이 집, 생각보다 좁아보이는데 나머지 경호 노예들은 어디서 지내는 거지?" "없어." 짧게 말하며 난 우유 위에서 맺히기 시작한 기름 덩어리들을 스푼으로 떠서 버리고 곧이어 컵에 검은색 찻잎을 부셔 넣었다. "지금 내 귀가 이상한 건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알레그로의 반응. 만들어진 차를 들고 등을 돌린 순간 난 얼굴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은 '만약 정말 그렇다면 네 놈은 미친새끼다'라는 뜻을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자살충동을 느낀다면 좋은 독약을 알아 봐 주지." "천만에. 난 그런 생각은 없어. 물론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하하. 아는 녀석이 이러고 있다고?" 알레그로는 얼굴을 굳혔다. 차가운 갈색 눈이 붉게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싶은 순간 느껴지는 오싹함.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목을 제꼈다. “윽.” 툭 앞섶이 잘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주르륵 흘러내리는 붉은 것. 이건...피? 목에서 흘러내린 것이 투둑투둑 옷깃을 적신다. 목에 닿는 서늘한 느낌에 감히 움직이지는 못한 채 칼을 빼어든 알레그로를 바라보았다. 오싹.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왜 이래!" 아무말도 없이 알레그로는 싸늘한 눈으로 날 쏘아보며 단검을 내 목에 댄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도 덩달아 일어서서 알레그로가 한 걸음 씩 올 때 마다 뒷걸음질 쳤다. 녀석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은 조롱기와 시니컬함이 담겨있지 않은, 일체의 이글거리는 분노를 담고 있었다. 분노? 무엇에 대한? 어쨌든 녀석은 진심이다. 날...죽이려고 하는 거야! "미, 미친새끼!" 외치며 들고 있던 찻잔을 녀석에게 던졌다. 그 바람에 데워진 우유가 녀석의 옷자락을 흠뻑 적셨다. 쨍그랑. 찻잔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난 녀석을 피해 식당 밖으로 내달리려고 했다. 머리 위로 스치는 단검을 피하려다 바닥에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죽는구나. 소름이 돋고 털이 곤두선다. 쿵쾅쿵쾅 울리는 심장.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내가, 내가 왜 죽어야 하지? 난 살고 싶단 말이다! "두렵지?" 알레그로는 다리로 내 다리를 단단하게 죈 채 내 등위로 올라타 내 뒷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두피가 당기는 아픔과 치욕감, 그리고 분노에 몸이 떨렸지만 날카롭고 서늘한 것이 내 목뒤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바로 죽이지 않는 거지? 날 조롱하다가 죽일 생각인가?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알레그로는 세개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난 턱을 젖히며 신음소리를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내 귀에 알레그로는 속삭였다. "지금 네가 해야 하는 일이 뭔 줄알아?" "윽..." "이렇게 병신처럼 바닥에 뒹구는 주제에 입만 꾹 다물고 있는 게 아니라 소리쳐 호위를 부르는 거다. 그런데 그 호위는 어디 있지?" 목과 등이 저린다. 당기는 두피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난 네 놈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가진 것에 맞게 처신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하지. 네 처지가 어떠한지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있어. 네 놈의 머리는 장식인가?" "나도 알고 있어! 내 상황이 어떻다는 것쯤은 나도...윽." 알레그로는 거칠게 내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가 다시 끌어당겼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잔뜩 비아냥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하? 그런데 이 지경이 되도록 호위도 제대로 두지 않으셨나? 말해봐 캐롤라인. 목이 댕겅 잘리기 전에 말이야." "왜...화를 내는 거지?" "그야 너 같이 배부른 녀석들, 가진 것에 맞지 않게 능력도 없는 멍청이들을 보면 속에서 열이 치밀거든. 게다가 너 그 이후로 하이드에게 가지도 않았지?" 아. 하이드. 그 눈빛이 걸려 난 녀석에게 가는 것을 피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날 이후로는 한 번도... "기껏 마련해 준 기회를 날려 버리려는 새끼, 아무리 말해줘도 진지하게 새겨듣지도 못하는 새끼 같으니. 아마 날 이렇게 화나게 만드는 녀석은 네 놈이 처음일 거야. 네 녀석에겐 학습능력이라는 게 전혀 없나보지?" 알레그로는 이를 갈 듯 말했다. 그렇군. 난 기껏 준 기회를 저버리고, 녀석이 말해 준 것을 머릿속에 담으면서도 제대로 현실감도 느끼지 못한 채... 그 때 식당 문이 확 열리며 블레탈이 뛰어들어왔다. 블레탈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커진다 싶은 순간 블레탈의 허릿춤에서 검이 뽑혀 휘둘러졌다. 챙- 보이지는 않지만 알레그로가 단검으로 검을 막은 것 같다. 내 머리 위에서 쟁쟁이 울려퍼지는 검 부딪히는 소리에 오싹해져 이를 악물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블레탈이 내 팔을 잡고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응." 살았다. 난 살았구나. 몸에서 힘이 빠짐과 함께 쿵쾅대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블레탈의 뒤에서 알레그로를 보니 한 치는 될 법한 단검을 오른손에 든 채 유쾌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저 검에 내 목이 잘릴 뻔 했다고 생각하니 몸이 절로 떨렸다. "검은 폼으로 달고 다니는 노예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군." "이 자식! 라인님에게...!" 블레탈의 눈빛이 날카로워 진다 싶을 즈음 블레탈은 알레그로 쪽으로 뛰어가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는 매섭고 형형해 내가 알던 블레탈이 아닌 것 같다. 알레그로는 검의 사정거리 탓인지 단검을 든 채 블레탈의 장검을 막기만 할 뿐 공격을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초조하게 그것을 보고 있는데 블레탈의 장검이 알레그로의 팔을 스쳤다. "큭!" 인상을 쓰는 알레그로. 찢어진 옷 사이로 핏방울이 떨어진다. 멍청하구나 이라인.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다니. 노예인 블레탈이 중인인 알레그로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멈춰! 그만두라고!" 초조해져 외치는데도 블레탈은 휘두르는 검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내 몸 하나 지킬 줄만 알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만 둬 블레탈! 알레그로를 죽이면 넌 사형이라고!" 블레탈은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인지 검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알레그로는 검을 피해 찬장 쪽으로 가다가 의자를 잡고 블레탈에게 던졌다. 블레탈이 그것을 피하자 의자는 다른 의자들과 부딪히며 우당탕 바닥에 쓰러졌다. “블레탈!” 블레탈은 매우 차갑게 얼은 보라색 눈동자로 알레그로를 노려보며 의자를 피해 검을 찔렀다. 알레그로가 목을 숙여 피하자 검은 그 자리에 놓였던 찻잔을 건드려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 틈을 노려 알레그로가 검을 들고 블레탈의 가까이로 달려들자 블레탈이 몸을 피하며 왼손으로 검집채를 잡고 알레그로를 후려쳤다. “윽!” 블레탈은 검끝을 알레그로에게 겨눈 채 몸을 떨었다. 화려한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블레탈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날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블레탈. 이건 아니야. 게다가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알레그로는... 그 때 울려퍼지는 웃음소리. "이거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되는데?" 하이드! 밝은 톤이지만 기묘하게 소름이 돋는 목소리를 내가 잊을 리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열려져 있던 식당 문 틈새 사이로 황금색 눈동자가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형형히 빛나는 눈은 내 쪽을 보며 천진한 아이처럼 희어졌다. “안녕, 라인?” 오싹하게 돋는 소름. 그 때 또다시 챙하고 울려 퍼지는 검 부딪히는 소리. 놀라 등을 돌리니 어느 샌가 알레그로가 검을 잡고 다시 블레탈과 싸우고 있다. “그만해!” 내 말이 귀에 박히지도 않는 건가. 제길. 그렇다고 칼싸움 하는 데 끼어들어 내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주먹을 꽉 쥔 손바닥으로 축축하게 땀이 빼어드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하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려줄까?” “...뭐?” 놀라서 문틈을 보니 하이드 녀석은 아직도 문 틈새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황금색 눈동자가 꺼림칙하지만... “어서 말려 봐.”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니까. 황금색 눈동자가 날 향해 웃는다 싶은 순간 문이 쾅 열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둘 사이로 뛰어드는 흑발의 소년, 하이드는 마치 야수와 같은 엄청난 몸놀림으로 둘의 옆에 나타나더니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철퇴를 양 손에 각각 한 개씩 들고 휘둘렀다. 부웅-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기에 얻어맞기라도 하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녀석들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을 때 가까스로 철퇴를 피한 알레그로와 그보다는 더 일찍 피한 블레탈의 시선이 하이드에게 쏟아졌다. 하. 다행이다. 쿵덕대던 심장이 가라앉는 기분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이드가 블레탈을 향해 철퇴를 휘두르는 것이다. “피해!” 다행히 블레탈이 화려한 몸놀림으로 피하자 철퇴는 부질없이 바닥에 박혔다. 그 틈을 타 블레탈이 장검을 하이드에게 휘두르는데 하이드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목을 젖혀 검을 피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철퇴를 놓으며 블레탈의 어깨를 짚고 뒤로 넘어가더니 주먹으로 블레탈을 후려쳤다. “윽!” 바닥에 쓰러진 블레탈의 보라색 눈동자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하이드는 블레탈의 등에 앉더니 어느새 블레탈의 목을 죄었다. 황금색 눈동자는 마치 사냥감의 살점을 뜯고 싶어 하는 야수처럼 그렇게 번들번들하게 빛이 난다. 당장이라도 블레탈을 죽일 것 처럼! “그만해. 난 말리라고 했지 죽이라고는 하지 않았어!” “그럼...” 날 보며 히죽 웃는 하이드. “몇 군데 불러도 되지?” “안 돼.” “그러면 칼집을 내는 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블레탈을 놔 줘!” 머리가 핑 돈다. 입이 바싹 마른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 때 하이드가 블레탈의 목을 밀치듯 놓았다. 그 순간 블레탈이 헉헉 거리며 주먹을 하이드에게 휘둘렀지만 하이드는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블레탈의 등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왔다. “자, 됐지?” 이렇게 쉽게 블레탈을 놓아 줄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급히 블레탈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괜찮아?” “예.” 블레탈은 이를 악물고는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들고, 금방이라도 배어버릴 기세로 알레그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알레그로는 일그러진 입꼬리에 비웃음을 머금고 엉망이 된 옷을 털 뿐이다. 사실 나도 과히 썩 좋지는 않은 기분이라 그런 알레그로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알레그로가 진심으로 날 헤칠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어쨌든 죽는다고 생각한 그 순간의 공포는 아직까지 미미한 떨림으로 남아있으니까. 그런 내 팔을 블레탈이 잡았다. 확연히 느껴지는 손에 맺힌 땀. 파르르 떨리는 긴 눈썹. “잃는 줄 알았습니다...” 멍하니 블레탈을 보는 그 때 무언가가 내 다리를 치고 떨어졌다. “이건?” 정신을 차리고 주워보니 내 앞으로 된 편지다. 내가 고개를 들자 알레그로가 나가려는 듯 문손잡이를 잡은 채 말했다. “신년제 초대장이다.” “신년제?” “엘위론에서 특히 중요한 행사인 만큼 연회가 빠질 수 없지. 네가 중인인 이상 중인들의 연회에 참석해야 하니 딴 데 신경쓰지 말고 그거 준비나 잘 해.” “잠깐.” 나가려는 알레그로를 붙잡으니 짜증나는 얼굴로 날 돌아본다. 은근히 화나게 하는군. 하지만 내 눈에 붉은 색의 옷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는 피 얼룩이 비친 이상 가게 내버려둘 수 도 없는 노릇이니. 이 추운 날씨에 상처를 방치한 채 말을 달리면 분명 상처가 얼어 동상에 걸리고 말테니까. “치료하고 가도록 해.” “마음도 좋으시군?” “전에 네가 날 네 집에서 재워 준 대가라고 생각해.” 게다가 네 녀석이 날 칼로 위협했던 것은 날 위해서니까. 아직도 현실감각이 없는 날 깨우치기 위해서.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 때 블레탈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렸다. “라인님!” 가까스로 분을 참는 듯한 눈동자. “당신을 해하려 한 자를 집에 들이겠다니!” “블레탈, 알레그로는 진심으로 날 죽이려 한 게...” 해명하기도 전에 알레그로가 블레탈을 향해 차게 말했다. “주인이 말할 때는 듣는 거다, 노예.” “알레그로!”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블레탈의 화려하고 섬세한 얼굴이 파들파들 떨렸다. 분명 상처 입었을 텐데, 내게 있어서 블레탈은 노예 같은 게 아닌데, 알레그로는 어째서 저런 말을 해서는! 그 때 블레탈이 검을 잡은 손을 떨더니 빠른 발걸음으로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블레탈!” 급히 따라 나서려는데 알레그로가 내 앞을 막아섰다. “비켜!” “이대로 저 노예를 따라 나선다면 네게 더 실망하게 될 거야, 캐롤 라인.” “노예라니! 블레탈은 내게 단순히 그런 존재가...” “노예야.” 순간 알레그로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에 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레그로의 붉게 보이는 갈색 눈은 아까까지 보이던 조롱기나 비웃음 따위는 일체 담지 않은 채 그저 차갑다. 알레그로는 얼어있는 내게 다시 말했다. “저건 노예야.” “......” “노예가 주인의 명에 불복하려고 한 것으로도 모자라 제 뜻대로 안 되자 주인의 허락 없이 뛰쳐나가고. 헌데 그런 노예를 이제는 달래러 그 주인이 쫓아가겠다는 거냐?” “알레그로...” 알고 있다. 이 세계에서는 알레그로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레그로가 날 위해 충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뭐라 반박해도 알레그로는 이해 못 할 것임을. 게다가 나 자신도 이 세계에 그저 순응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이 아파. 친구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을 두고 볼 수 밖에 없다니... 난 정말 등신이군. 난 알레그로를 노려보며 한 마디 하고 말았다. “네가 밉다.” “좋은 약은 몸에 쓴 법이지.” “한 대 패고 싶을 정도야.” “흥, 그 비리비리한 몸으로?” “너 대체...무슨 생각으로 날 이렇게 까지 도우려 하는 거지?” “글쎄? 우선은 네 노예에게 얻은 상처를 치료해야겠어. 그리고 다른 손님도 있는데 나하고만 이야기하고 있으면 실례지 않아?” 그러면서 알레그로는 내 어깨를 툭툭치고 밖으로 나가버리고 난 그제야 하이드가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서서 날 바라보는 긴 흑발의 소년. 날 삼킬 듯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저 황금색 눈동자를 어떻게 순간이나마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아, 그래. 블레탈, 블레탈 탓이다. “너는 어쩐 일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친해둬야 한다는 알레그로의 충고. 애써 웃으며 하이드를 보니 하이드는 묘하게 웃었다. “그 녀석이 그렇게 좋아?” “뭐?” 등골을 치고 지나가는 오싹함. 하이드는 웃는 낯을 풀지 않은 채 황금색 눈동자를 좁히며 확인하듯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보라색 눈깔을 한 노예 놈 말이야.”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하지만 이런 질문에 할 수 있는 답이란 이 것 밖에 없다. 미안해 블레탈. “아끼는 하인일 뿐이야.” 내가 블레탈을 ‘친구’로 대한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이해 못 할 테고, 블레탈에게 좋을 것도 없으니까. 애써 떨어지지 않는 대답을 한 뒤 본 하이드의 얼굴은 아까 전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뭔가 위험한 것이 사라진 느낌. 내 착각인가. 어쨌든 손님이 왔으니 뭔가 손님맞이를 해야 하는데, 주변을 둘러 본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맨들맨들 하던 나무 바닥은 온통 깨진 찻잔과 찻물로 엉망이 되어있고, 우아한 곡선을 뽐내던 식탁에는 검집이 가차 없이 나 있고, 식탁 의자들은 사방에 나뒹굴고... 이래선 접대는커녕 청소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다. “여기선 이야기하기엔 무리니까 내 방으로 가자.” 사실 하이드는 꺼림칙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또 블레탈에 대한 걱정 탓으로 머리가 지끈대기도 해서 녀석에게 내 방을 소개시켜 주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지만, 난 녀석을 이끌고 엉망진창인 식당에서 나왔다. 나오니 피에와 샘 노인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 것이 여태껏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만하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주뼛거림과 죄책감섞인 얼굴에 난 웃을 기력도 나지 않았다.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은 되었지만 날 구하러 식당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이건가. 하지만 중인들이 칼부림 하는데 끼어들 정도의 담력을 평범한 노예인 저들이 가질 수는 없겠지. 이해는 되지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블테탈은 달랐는데, 녀석은 날 구하기 위해 자기보다 높은 신분에게 검을 휘둘렀는데 그 정도로 날 걱정했는데... “알레그로는?” “혼자서 치료할 수 있다시며 약과 붕대를 들고 손님방으로 들어가셨지요. 흄 녀석은 그 분의 목욕물을 받고 있습니다.” “여벌의 옷을 알레그로에게 갖다 주고 식당 좀 치워. 그리고...” “예.” 말 끝을 흐리자 피에가 잽싸게 끼어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맹한 구석이 있는 흄과 달리 눈치가 빠른 피에니 밖으로 뛰쳐나간 듯 보이는 블레탈을 데리고 돌아와 주겠지, 아마도. 피에와 샘노인을 내버려 둔 채 이층에 올라 내 방으로 들어가니 뒤이어 따라 들어온 하이드가 방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야.” “뭐가?” “라인을 닮아 정갈한 느낌이 이 방에서 한껏 배어져 나오는 걸. 밝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유혹적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확실히 내게 있어서도 이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방이긴 하지만 그저 방일 뿐인데. 어쨌든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턱을 괴며 내게 웃는 하이드는 부담스럽고 거리껴졌다. 녀석의 미친 야수같이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때문일까, 아니면 녀석이 있던 곳의 추잡했던 기억 탓일까.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며 알레그로에게 봉변을 당하느라 우유가 튀고 군데 찢어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윗옷의 단추를 끌렀다. 하나...둘... 확연히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 옷을 벗다 말고 녀석을 휙 보니 녀석은 황금색 눈동자를 희며 내게 웃는다. “왜?” “아니...” 남의 몸을 노골적으로 보면 옷 갈아입기가 민망하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대뜸 내뱉기는 뭣해서 별 수 없이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은 후 녀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오늘은 유난히 이 말을 많이 쓰게 되는군. 하이드는 요사하게 웃었다. “라인이 보고 싶어서 왔어.” 당황스러운 말에 난 별 대답을 못 하고 ‘아...그래?’하고 말끝을 흐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친했던가? 뭐, 하이드가 내게 호감을 느꼈다면 좋은 일이긴 하지만, 난 녀석에게 호감은커녕 약간의 두려움과 혐오감까지 느꼈었는데 녀석은 전혀 그걸 느끼지 못했나보지? “차는...대접하기가 그렇고...” 오늘 새벽에 상회의 마차가 다녀가면서 배달해 온 쿠키가 있으니까. 마침 선반에 올려 둔 쿠키 뭉치가 보여 난 그것을 열어 접시에 담은 후 탁자위에 올렸다. 그러자 하이드가 그것을 한 개 집어 들며 물었다. “이런 거 좋아해?”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냐. 단 것도 적당히 먹어야지 맛있는 법이지.” “난 엄청 좋아해.” 톡. 하이드의 손에서 쿠키가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또 한 개가 톡, 또 한 개가 톡. 어이가 없어져 보고 있으니 하이드가 잠시 쿠키로 집중했던 시선을 내게 돌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동강내는 맛이 일품이거든.” 짐짓 소름이 돋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먹지는 않아?” “그런 건 관심 없어. 그저 재미만 보는 거야.” “그래도 보통은 먹으려고 쿠키를 사지 않아?” 하이드는 반동가리 쿠키를 내게 내밀었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입에 넣으니 하이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눈매를 희었다.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특별히 주는 거야. 보통은 버리지만.” 그거 내 쿠키인 걸로 기억하는데. 어이가 없지만 하이드의 이상한 사고방식에 토를 다는 짓은 왠지 피곤한 일이 될 것 같아 잠자코 하이드가 또 내미는 쿠키를 받아먹었다. 아무래도 별로 크지 않던 쿠키인데 하이드의 손에 그 마저도 동강나버린 쿠키는 금방 내 입속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또 반동가리 쿠키를 내민다. “역시 너는 다이엔처럼 땍땍 거리지 않아서 좋아.” 다이엔이라면 하이드의 다른 인격? 그 때 보았던 갈색머리의 차분했던 여자애? “땍땍 거리다니?” “쿠키를 동강내고 있으면 먹는 음식으로 장난친다고 뭐라 뭐라 해댄단 말이야?” “지금도?” “아니, 내가 억지로 한 구석에 처박아 둬서 못 나올 거야. 당분간은.” 그러면서 통쾌하다는 듯 웃은 하이드는 또다시 내게 반동가리 쿠키를 내밀어 날 심히 불편하게 했다. 한 번에 먹어치우려고 주문한 쿠키가 아닐뿐더러 이렇게 도막이 나게 하려고 주문한 것은 더더욱 아닌데. 하지만 내 속이 쓰리건 말건(이 곳의 쿠키값이 서울에 있는 제과점의 쿠키값 보다도 훨씬 비싸다는 데 더 쓰려지는 느낌이다)하이드는 또다시 멀쩡한 쿠키를 반토막으로 만들었다. 아마 저 녀석은 ‘톡’하고 쿠키가 부러지는 소리와 감촉에 묘한 카타르시스라도 느끼나보다. “다이엔...을 싫어해?” 차분하고 맑은 갈색눈매가 이지적이었던 소녀. 왠지 알레그로를 싫어하는 듯 보였었지. 게다가 하이드와 정반대의 분위기가 풍겼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하이드는 내 물음에 쥐고 있던 쿠키를 으스러뜨렸다. “응. 역겨울 만큼.” 황금색 눈동자가 번들번들하게 빛이 났다. 마치 다이엔이 앞에 있으면 찢어버리기라도 할 것 처럼.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다른 인격인데 저렇게 까지 미워하다니...? “왜?” “퍽하면 간섭하고 착한 척 하거든? 게다가 나가서 하는 짓이란 힘도 없는 것들한테 빌빌대는 일이지. 병신. 그리고 말이야...” “응?” 하이드는 내게 요사하게 웃으며 내 오른손을 끌어당기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녀석의 붉은 혀가 쿠키 부스러기가 뭍은 내 손끝을 농밀하게 핥기 시작했다. 맙소사. 숨이 확 막혔다. 내 중지와 검지 사이를 희롱하듯 감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혀의 감촉과 ‘츄츄읍’하는 질퍽하게 빠는 소리. 마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느낌에 얼굴이 절로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빼기 위해 손을 뒤틀었지만, 강한 손이 내 팔을 붙들어 내 뜻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윤기 나는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웃는 붉은 입술 위, 황금색눈동자는 숨 막히게 선정적이고 요염하게 날 바라본다. 그 눈에 담긴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욕망. “놀랐네?” 녀석의 야수와 같은 황금빛 눈동자에 잡혀 난 녀석이 내 손가락을 입에서 땠을 때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이드가 슬핏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싶은 순간 녀석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칙칙한 갈색머리를 가진 계집은 기분 나쁘거든. 라인처럼 아름답다면 몰라도.” 노골적으로 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손가락.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절로 몸이 떨렸다. 다행히 하이드는 곧 손을 거뒀지만 난 너무 놀라 재밌다는 듯 날 바라보는 하이드와 멍하니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알레그로가 들어올 때 까지. “노크를 했는데도 왜 대답을...뭐야, 유치하게 눈싸움이라도 하는 중이냐?” “조금 장난을 쳤거든. 단지... 라인이 너무 순진하게 반응을 해서 말이야.” 그러고선 큭큭대며 웃는 하이드의 모습에 난 머리가 어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장난, 장난일 뿐이라고? 그래, 장난이라면 장난이겠지. 단, 성적인 뉘앙스가 섞인,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빼면. “옷이...맞지 않나보지?” 속에서 치미는 화와 절로 치미는 것 같은 두통을 애써 누르며 난 방으로 들어온 알레그로가 들고 있는 옷을 뺏어들었다. 정석대로라면 화를 내는 게 정상이지만, 하이드는 장난이라며 웃어넘기고 나는 녀석과 친해둬야 하는 판이니. 알레그로는 뭔가 감을 잡았는지 평소 같은 이죽거림 없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윗옷은 그럭저럭 맞는데 바지가 너무 작아. 좀 적당한 걸 찾아주라고.” “내 옷은 안 맞는 것 같으니 여분의 옷을 찾아봐야겠군.” 그러곤 하이드의 시선을 뒤로 한 채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숨이 트임과 동시에 치밀어 나오는 욕지기에 난 내 방을 노려보았다. 뒤이어 문을 닫고 나온 알레그로가 그런 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장난이라잖아. 뭘 흥분하고 그래?” “장난? 장난이라고? 저 녀석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놈은 날 우습게 본 거다. 만만하게 본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몇 번 보지도 않는 내게 그딴 짓을 할 리가 없지. “뻔하지. 추근덕거리기라도 했겠지.”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이봐. 너 같은 도련님에겐 녀석의 저속한 장난이 매우 불쾌할 수도 있지만, 녀석에겐 정말로 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왜냐면 놈은 애초에 쓰레기들과 밖에 어울려 놀 줄 모르는 놈이라...그런 놈들끼리의 장난질이란 건 뻔하잖아?” “그래서 좋게 받아 넘기라고? 처음 봤을 때도 기분 나빴지만 이제는 대놓고 날 얕보며 저질스러운 장난질 까지!” 이를 악물고는 빈 방으로 향했다. 들어가 한 구석의 옷장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히니, 안에는 전에 에스트라가 블레탈에게 잔뜩 넘긴 옷의 일부와 내가 만일을 대비해 옷가게에서 주문해 산 헐렁한 옷들이 걸려 있다. 그 중 적당한 바지를 빼서 내밀자 알레그로가 받아 입으며 심드렁히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된 거 아냐?” “뭐?” “그네 친구들끼리 하는 장난을 네게 칠 정도로 네게 관심을 보이고 있잖아?” “그 딴 관심이면 없는 게 오히려 나아.” “그게 아니잖아. 너 자신도 알면서 뭘 그래, 캐롤 라인.” 알레그로의 비아냥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이드에게 화를 내지 않고 참은 것도 그 때문 아냐. 귀족 놈들의 모임 때 널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넌 사정에 따라 자존심을 죽일 수 있는 놈이지. 네 멍청한 처신과 네가 가진 것에 대한 질투, 알지 못하는 너에 대한 갖은 소문으로 왕도의 사교계에는 네 적들이 태반...” “젠장.” “그래서 하이드가 필요한 거잖아?” 열이 북돋아 지끈대는 뒤통수를 벽에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거울을 본 알레그로는 잔뜩 눈을 찡그리고는 ‘촌부의 차림도 이것보단 낫겠군.’이라는 말을 내뱉고는 옷장을 열어 자기가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며 녀석은 계속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상기시켰다. “귀족 놈들에게 함부로 ‘그런’모욕을 두 번 다시 당하지 않을 만큼 ‘힘’을 얻기 위해 넌 중인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쳐야 하지. 그래서 내가 추천한 게 타락할 대로 타락한 녀석, 하이드.” “......” “공식적으로라면 유명한 무가인 사욘가의 차남. 게다가 ‘타락한 놈들’의 리더. 하이드의 패거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든 가차 없이...아, 물론 귀족이나 왕족 분들은 제외하고. 여튼 사욘가의 힘이란 대단해서 왠만한 녀석들은 놈에게 당하면서도 속으로 삭힐 수 밖에 없지. 다들 녀석을 두려워한다 이 소리야. 그런 놈의 친구로 사교계에 떡 하니 첫 등장을 한다면 누구도 함부로 널 무시하고 모욕할 수는 없지.” “...마치 기생충같군.” “맞아! 기생충.” 싫은 것을 저렇게 얄밉도록 상기시키다니. 놈의 칼에 위협 당했을 때의 분노까지 함께 떠올라 알레그로를 노려보는 순간, 알레그로가 거울을 통해 날 보며 사늘하게 웃더니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단, 뇌에 숙주하는 기생충이 되면 되잖아.” “......” “교활한 그 놈을 네 손에서 주물락 거리라고. 그러기 위해선 시덥잖은 장난정도는 받아 줄 수도 있잖아?” “...좋아. 녀석이 정말로 날 우습게보고 그딴 짓을 한 게 아니라면.” 자존심이 상하고 아직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이렇게 참을 수 밖에. 정말 알레그로의 말대로 장난에 불과했다면 내가 이렇게 혼자 흥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인 것이다. 게다가 내 쪽이 하이드가 필요한 바에야 내 자존심 때문에 혼자 성질을 낸다는 건 더욱더 코웃음 칠 일이지. 알레그로는 자기가 고른 바지를 입으며 말했다. “이제야 옷 태가 좀 나는 군.” “......” “멍청히 있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지 그래? 난 목욕이나 해야겠어.” “그러고 보니 상처는?” “뻔히 붕대로 감겨있던 걸 보고 또 묻는 심보는 뭐지? 미친놈이 보기 싫은 건 이해하겠는데 더 이상 질질 시간 끌지 말라고.” 그러고선 알레그로는 밖으로 나가버리고 난 한숨을 쉬고 다시 방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내 방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짧다는 게 욕이 나올 줄이야. 예전 내 집에 비해선 엄청 큰 집이 분명한데 왜 이렇게 좁다는 느낌이 드는지. 마음을 가다듬고 내 방문을 여니 아직도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지지 않는 황금색 눈동자가 날 보며 웃는다. “늦었어.” 그 많던 쿠키가 다 동강이 나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놈. 하지만 난 애써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히며 이 말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전의 장난말인데.” “응?” “난 그런 것에는 익숙하지 않으니까 다신 하지 말았으면 해.” 이 정도 말했으니 알아듣겠지. 하이드도 아무 말이 없고 해서 속으로 안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떨어지는 웃음기 섞인 소리. “싫은데.” “뭐?” “한 번 한 말은 반복하지 않아.” 그렇게 말을 끊는 하이드 녀석은 나른하게 웃고 있지만 그 눈은...젠장. 마치 포악한 성질을 죽이고 있는 야수처럼 번들하니 광택을 내뿜고 있어서 난 녀석이 몇 십분 전까지만 해도 싸움을 말린답시고 철퇴를 휘두른 포악한 놈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내게 호의를 표하고 있긴 하지만 알레그로의 말이나 아까전의 행동을 보면 포악하기 짝이 없는 미친놈...인 것이다. 그런 놈에게 내 말이 먹혀들 리가 없지. 애초에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상대라니. “그럼 알레그로가 올 때 까지 뭐할래? 게임?” 체념하며 내키지 않지만 녀석의 맞은편에 앉으니 하이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본다. 그러곤 하는 소리가, “게임이라면 도박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나르칭스크>?” “그게 뭔데.” “몰라? 두 년을 데려다가 채찍으로 때린 후 누가 오래 더 버티나...이긴 쪽이 진 쪽에게 여러 가지를 시키는 거야.” 욕지기가 치민다. 저런 걸 태연한 낯짝으로 말하다니. 그 여러 가지가 뭔지는 말 안해도 알 만하다. “아니. 내가 하려는 거는 오목이야.” “그게 뭐야.” 난 하이드를 무시한 채 종이위에 펜으로 줄긋기를 반복했다. 녀석이 이런 걸로 시간을 때우려고나 할지. 또 추근대면 어쩌지? 암담해지는 속에 한숨만 절로 나왔다. 정말 간만에 오늘처럼 피곤한 하루는 없었던 것 같다. 오목을 비롯한 게임들과 맛있는 간식들(덕분에 저녁식사는 필요 없었다),달콤하고 독한 술들, 그 와중 정말로 평범하다 싶을 이야기들로 의외로 하이드나 알레그로는 잘 어울렸다. 물론 나는 그 와중 하이드에 대해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지만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은 결국 밤 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한 듯 손님방으로 가 버렸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 빛을 바라보며 일층 벽난로 앞 소파에 노곤한 몸을 기대고 있는데, 이층에서 피에가 내려오다가 날 발견하고 조심스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기력이 나지 않아 몸을 그대로 누인 채 피에를 보았다. “주인님, 올라가서 쉬세요. 청소는 다 끝났습니다.” “난장판이라 힘들었을 텐데.” 방을 나오기 전만해도 하이드 녀석이 뻐금대며 피어낸 담배 연기나 먹다 남은 음식들, 술병, 아무렇게나 엎어트린 카드나 보드 게임 판, 빈 잔 등으로 잔뜩 어지러웠던 내 방을 생각하니 혼자 치우게 한 게 미안할 정도군. 그러고 보니 오늘은 불청객 때문에 흄, 피에, 샘 노인은 하루 종일 청소로 일과를 보냈겠지. 엉망이 된 식당, 하이드와 알레그로가 지낼 방 청소, 욕실까지. “아니요, 소인이 할 일입니다.” “...블레탈은?” 약간은 멍한 정신 속에 내내 목에 박힌 가시처럼 걸렸던 것. 어렵사리 물으니 피에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사실 나가서 돌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자고 있구요.” “그래?” “예.” 밖이라고 해봤자 추운 눈밭과 숲, 가까이 있는 호수가 전부인데. 대체 그 추운 곳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난 비틀 일어나 블레탈과 흄, 샘노인이 자고 있을 방 쪽으로 향했다. 피에가 뒤에서 잔뜩 당황한 기색으로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난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사방이 검었다. 창으로 비치는 푸르스름한 달빛이 약간의 음영을 주어서 사물이 있는 곳을 파악하게는 해 주었지만, 아무래도 블레탈이 자는 모습이라도 보기엔 무리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피에가 뒤에서 등불을 준비해 내 옆에서 치켜들었다. 덕분에 등불가까이 있는 곳은 밝아졌다. 생각대로 흄과 샘노인은 곤한 듯 이불을 꼭 덮고 잠을 자고 있었다. 빛 때문에 그런지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눕는 흄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코를 가볍게 드르렁 골아대는 걸 보니 잠에서 깨지는 않은 모양이다. 안심하며 더 안쪽으로 가니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블레탈이 눈에 들어왔다. 흔들리는 등불 빛에 비치는 곤히 잠은 블레탈은 마치 어느 신화에 나오는 소년 신처럼 아름답다. 배게 위에 흐드러진 빛나는 결 고운 보라색 머리카락은 마치 자수정처럼 빛나고, 만지면 서늘한 기운이 배어날 것만 같은 티끌하나 없는 하얀 피부가 마치 환상 같다. 그 가운데 적당히 붉은 입술과 섬세하게 한 점의 오차 없이 올라선 매끈한 콧날, 고요히 감긴 눈 밑의 길고 섬세한 속눈썹은 인간일까 의심이 될 정도로 완벽해서 난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블레탈이 잘 생겼다 차원을 넘어 아름답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이제는 좀 적응이 되었긴 하지만 이렇게 자는 모습만 보니 마치 내가 아는 블레탈이 아닌 것 같다. “아니, 사실 내가 잘 아는 것도 아닌가.” 마음을 트긴 했지만 사실 특별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도 없으니. 게다가 당분간 블레탈과 이야기하기엔 무리겠지. 오늘의 일로 잔뜩 화가 났으니까. 한숨을 내쉬며 슬쩍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분명 내가 사는 세계에 있었더라면 모델이나 연예인 등이 되어 이 외모만으로도 찬사를 받을 텐데 이 세계에서는 한낱 노예라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어쩌면 전 세계에서는 너무도 비참하고 보잘 것 없던 나와는 달리 너무나도 멋지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미안해.” 조용하게 속삭였다. 잠든 블레탈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걸 아는데 뭔가 말을 하고 싶어졌다. 분명 듣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알레그로와 하이드와 어울리며 입 속으로 들어간 몇 잔의 독한 술기운 탓일까, 아니면 잠기운 탓일까, 검은 밤의 기기묘묘한 분위기 탓일까, 누나와 친구들이 몇 번씩 지적했던 내 쓸데없이 섬세한 기질 탓일까. 내 뇌가 쓸모없는 짓이다라고 충고를 하는데도 나도 모르게 주절거렸다. 뻔히 뒤에 피에가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도 아는데 여태껏 감춰진 내 속을. “이 곳...너무나 차가운 이곳에 와서 숨이 막힐 것 같았어. 내가 살던 곳도 날 숨이 막히게 만들었지만, 여긴 날 다른 의미로 죄었어. 그래. 사실 상상하곤 했어. 내가 사랑하긴 하지만 내게 그만큼 부담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없는 공간. 그 사람들이 내게 큰 의미를 가진 존재고 날 얼마만치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그 사람들이 없으면 무너질지도 모르는 걸 알면서도 상상했지. 그 사람들을 위해 난 내 꿈을 접어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원망했어. 하지만 그 사람들이 없는 이 곳은...” 너무 차가웠다. 무서웠다. 대범해봤자 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열일곱의 소년일 뿐. 날 얽매는 동시에 날 가장 사랑했던 내 보호자 역할에 충실했던 누나와 떨어진다는 것은 순식간에 나더러 홀로 서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내가 알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제도도, 사람도, 사고방식도 문화도 모두 다른 낯선 곳에서. 그게 두려웠지만 난 한편으로는 기묘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누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건 핑계, 어쩌면 누나가 이곳에서 더러운 과거 없이 새로 태어나는 게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대로 사라지면 분명 누나는 나 이상의 두려움과 상실감과 나에 대한 걱정에 불행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산타클로스의 제의를 받아들인 나. 실은 난 누나를 살리는 것 보다는 ‘새로운 세계’라는 것에 혹했던 게 아닐까. 미묘한 죄책감과 공포 속에 난 동시에 기뻐하는 추악한 이기심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척 했을 뿐, 나와 같이 예술적 피를 가진 동류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그 기쁨을 모를 리가 없다. 창작의 자유. 가슴과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선연히 빛나는 색채들을, 그리고 싶어서 떨리는 두 손을 난 얽어 매야했다. 하지만 난 자유를 얻었다. 자유! 추악한 이기는 내게 핑계를 삼아 곧장 연필을 들게 만들었다. 누나가 그리워, 누나를 그리자. 이건 잘못된 것이 아니잖아? 그렇잖아? 그래서 난 약속을 저버린 채 그리기 시작했다.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핑계로 누나를 그리고, 나중에는 호수를 그리고, 그리움을 달래기 위한 척 내 자신을 기만하며. 게다가 얼마 전에는 누나를 더 이상 예전처럼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며 다짐까지 했다.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면 그림을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는데 난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고. 일말의 죄책감에 계속 그림을 태우고 있긴 하지만. 아, 어쩌다 이런 걸 생각하게 되었지? 술기운이 의외로 센가. 미간을 누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차가웠어. 낯설었지. 그런 내가 이곳에서 친근감을 가지고 정을 가지게 된 첫 친구가 너야. 쑥스러운 소리인 것 같지만, 너 날 더러 널 사라고 했잖아? 곧 집에 돌아와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빠지긴 했지만, 널 사 버린 건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해. 혹시 이 녀석이 내게 따뜻함을 가져다 줄 첫 타인이 아닐까.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닐까. 내 선택은 옳았어. 중간에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말이야. 넌 내가 얻은 이곳에서의 최초의 친구다 이거지.” “주인님...주무시지요...” 피에가 뒤에서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여기에 계속 있는 게 안절부절 못한가 보다. 하긴 주인인 내가 저 앞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푸는 것도 걱정이 될 지도. 역시 술기운이 센가. 난 ‘잠시만’하고 피에를 향해 웃은 다음 한숨을 내쉬고 블레탈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웠어, 블레탈. 이건 빈 말이 아냐. 이곳의 신분제가 얼마나 각별한지는 내가 몸소 느끼고 있어. 넌 내가 위험에 쳐하자 망설임 없이 알레그로에게 검을 휘둘렀지. 죽을 수도 있는데. 너처럼 멋진 녀석은 없을 거야. 그렇게 어렵게 날 구했는데 내가 날 죽이려고 한 알레그로를 순순히 집에 들여놓고, 상처걱정이나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하긴 내가 블레탈이라도 성이 났을 거야. 도와준 사람 바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술기운으로 어찔한 머리를 잡고 있는데 순간 블레탈의 눈이 조용히 날 바라보는 듯 보였다. 내 착각인가. 머리를 흔드니 눈이 다시 감겨있다. 아, 술기운 탓이다 역시. 적당히 마셔야 되는데. “두둔하는 게 아니라, 알레그로는 내게 중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무척 강조하는 녀석이라서. 하아.” 그놈의 신분제. “어쨌든 난 녀석에게 도움 받는 입장이야. 녀석은 날 위협해서 내게 경각심을 부추기려고...네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중에 네가 나타나 준 거야. 하하. 사실 알레그로가 너한테 고전해서 도망치는 폼이 제법 고소했다고.” 언제나 빈정거리고 비웃는 녀석이니까. 난 아무 답 없는 블레탈에게 미련을 떨치고 등을 돌렸다. 계속 자는 사람 앞에서 주절거려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술버릇은 남을 닮는다는데 누나한테 옳은 건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펑펑 울지는 않아 다행이군...” “예?” 이해하지 못한 듯 피에가 묻는다. 난 피에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아아. 술버릇 말이야.” “예에.” 방을 나와 이 층으로 올라가려는데 피에가 내 옷자락을 끌어 당겼다. 무슨 할 말이 있나? 물끄러미 바라보니 피에가 화들짝 내 옷자락을 놓고는 주저주저하다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인님.” “뭘 그리 놀라는 거야? 거기 빵 좀 집어주지 않을래?” 날 마주보는 조용하고 이지적인 갈색 눈.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놀랄 수밖에 없잖아? 한 번 경험했긴 했지만 방금 전까지 같이 식사를 하며 내게 주근덕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평범한 소녀로 변하다니. 얼빠진 내 모습이 우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난 그저 멍하니, 하이드. 아니, 다이엔이 얼굴을 찌푸린 채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버터를 잔뜩 바른 빵을 한 구석으로 밀어버리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주는 네 동생이 깨어있는 기간 아니었어?” 알레그로가 블레튜고를 들이키며 건성으로 묻는 말에 다이엔의 고운 이마가 찡그려졌다. “동생이라고 하지 마. 그리고 네 말대로 이번 주는 하이드가 깨어있어야 하는 기간이긴 하지만, 놈이 제 멋대로 내가 깨어있어야 할 저번 주 내내 날 밀치고 몸을 차지했거든. ” “아하. 결국 졸려서 뻗었다 이거군.” 그 소리는 하이드가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말? 다행이긴 하지만 사실 좀 마음이 복잡하다. 가지런히 내려온 옅은 색의 갈색머리나 평범한 이목구비, 차분한 갈색 눈은 아무리 봐도 하이드와 한 가지도 빼닮은 구석이 없는데. 그 때 다이엔의 눈과 마주쳤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눈동자. “아, 미안.”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 “미안할 것 없어. 그리고 하이드가 네게 한 일에 대해서는 사과 않겠어. 넌 내가 가라고 했을 때 가지 않았으니까.” “내게 한 일?” “내 입으로 말해야 되겠니?” 맙소사. 확 얼굴이 붉어지는 듯해 서둘러 고개를 숙여 스프를 떠서 마셨다. 이 여자애가 그런 것들을 다 보고 있었다니. 그 때 알레그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인, 이제부터 ‘신년제’준비를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할 거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예복준비를 해야지.” 다이엔이 끼어들어 말하자 알레그로가 뒤따라 말했다. “그리고 너 같은 경우엔 기본적인 예절과 관습도 잘 모르잖아?” “응.” “예절과 관습을 모른다니?” “아, 이 녀석은 외국에서 살다 왔거든. 엘위론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 “그래서 머리랑 눈 색이 까맸구나. 혼혈이지?” “정확히는 외조부께서 소이룬 인이야.” “소이룬?” “어쩐지. 타자리하의 혼혈이라 치기엔 피부가 너무 희어서 이상하더라니. 사욘 다이엔, 소이룬은 타자리하 옆에 있던 작은 나라야. 최근에 타자리하에 합병되었지.” “그래서 귀국한 거로구나?” 미리 생각해 뒀던 말을 늘어놓으니 알레그로와 다이엔은 알아서 저희들끼리 판단을 내려버렸다. 나야 양심에 찔리는 거짓말을 계속 하지 않아도 되서 좋긴 하지만 영 목의 가시처럼 걸린다고나 할까. 들킬까봐 일부러 망한 나라를 내세우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 때 다이엔이 조용히 말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엘위론은 다른 나라처럼 쓸데없는 예절 같은 건 없으니까. 네가 걱정해야 할 건 그런 예의나 관습보다는 네가 얼마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야.” “지식?” “신년제에서 중인들이 모이게 되면 자기가 취미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서로 늘어놓거든.” “어중간한 지식을 가지고 말하면 망신당하기 십상이지.” 난감한데. 이곳에 대한 기본상식도 부족한 내가 그런 이야기에 낄 수 있을까. 그런 내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알레그로는 짧게 코웃음을 치더니 ‘별 수 없군.’이라고 말하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특훈을 시켜주지.” “특훈?” “그럼 가정교사라도 부르려고 했냐? 그랬다간 순식간에 왕도에 소문이 퍼져서 비웃음이나 살 걸? 그리고 다이엔, 너도 좀 도와줘.” “내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이 애와 싫은 널 도와줘야하지?” 다이엔의 싸늘한 시선에도 알레그로는 유유히 입 꼬리를 올렸다. “어제 내가 네 다른 인격 손에 하마터면 죽을 뻔 한 것을 잊으면 곤란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지금 씹고 있는 건 이 집 주인인 이 녀석이 대접한 음식이다...이 말씀이야.” “흥.” “난 아카데미를 다녀야 하는데다 할 일도 있어서 널 내내 가르치긴 무리야. 직접적인 과외는 다이엔에게 받아. 난 네 예복이라든지 네가 읽을 책 같은 것들을 마련할 테니까.” 껄끄러운 분위기에 채할 것 같다. 하이드의 다른 인격인 이 여자애에게 교습을 받으라니. 혹시라도 중간에 하이드로 변하면 어떻게 하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도 내켜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 때 하이드가 날벼락 같은 소릴 했다. “그러니 다이엔이 당분간 지낼 방을 마련해 줘.” “뭐?” “아니면 네가 하이드의 아지트에 가서 당분간 지내던가.” 알레그로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이만 가야겠다며 마중하지 말란 말을 남기고 식당 밖으로 나갔고, 난 약간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다이엔의 가는 얼굴을 마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에 처음 만났을 때도 직접적인 통성명도 하지 못했으니까. 지금이 첫 만남이라 해도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대체 뭐라 말을 꺼내야 하지? 그 때 다이엔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방은 어제 하이드가 썼던 방을 그대로 쓸 게.” “아, 그러도록 해. 옷은... 남자 옷 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줄까?” “상관없어. 몸이 이렇다보니 거의 바지만 입고 살았거든. 치마를 입고 있다가 하이드로 변하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미안한데... 나 지금 피곤해서... 공부는 내일부터 하자. 하이드가 내 시간에 억지로 깨어있던 탓에 기력이 딸리거든.” 그러고 보니 왠지 낯빛이 창백해 보였다. 가만. 다이엔으로 변하고 나서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잖아? 많이 피곤한가. “괜찮아. 푹 쉬어.” “...인사가 늦은 것 같지만 난 사욘 다이엔이야. 잘 부탁해 캐롤라인.” 그 말만 마치고 다이엔은 조용히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남자 옷을 입어도 상관없다니 다행이긴 하지만...일주일 마다 여자인 자신이 다른 인격을 갖춘 남자로 변하는 탓에 치마 같은 것도 함부로 입지 못한다면 괴롭지 않을까. 내 기억엔 우리 누나도 청순한 원피스같은 걸 입는 걸 즐겼는데. “주인님!” 그 때 식당문이 벌컥 열리며 피에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아가씨가 집 안에 계셔서...! 그것도 주인님의 친구 분이 머무시던 방에 들어가시던데 어떻게 해야...” “그 친구의 누나야.” “하지만 분명 아무도...”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에 한숨이 나온다. 그렇다고 ‘그 여자애가 어제 난리쳤던 그 녀석이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금 왔어. 그렇게만 알아 둬.” “예.” “두 친구는 모두 떠났고, 그 여자애는 당분간 내 집에서 머물 거야. 그 여자애도 내 친구니까 잘 모셔.” “알겠습니다.” 왠지 다이엔이 불쌍하다. 그렇게 식당을 막 나오려는 차에 차가운 얼굴을 한 블레탈과 마주치고 말았다. 분명 어제 일로 화가 다 풀리지 않았을 텐데, 뭐라 말해야 하지? 당황해서 그저 마주 바라만 보고 있는데 블레탈이 내 팔을 잡았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뭘?” 블레탈의 손에 끌려 집밖으로 빠져나와 말을 타게 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내가 앞 쪽에 올라탄 블레탈의 허리를 잡자마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고, 난 맞부딪혀오는 바람에 눈을 찡그리면서 블레탈의 허리를 꼭 붙들 수 밖에 없었다. 블레탈이 말을 세운 건 어느 숲 어귀에서였다. 내가 언제나 가던 호수 부근은 아닌 것 같다. 처음 와 보는 곳이니까. 블레탈의 부축을 받아 말에서 내리니 블레탈이 고삐를 붙든 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옳기기 시작했다. 블레탈의 뒤를 따라 아무 말 없이 가던 나는 곧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저건...” 빽빽이 우거진 침엽수들의 가지 끝이 얼어붙어 마치 크리 스탈 조각처럼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단 한 그루가 아닌 수 십 그루가. 위로 쌓인 하얀 눈 사이 삐죽빼죽 튀어나온 초록 잎들에 맺힌 얼음 조각들은 마치 유리로 된 눈물처럼 혹은 모든 것을 미워하듯 솟은 창날처럼 삐죽이 솟아 빛에 반짝였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언제나 배경의 모델로 삼는 호수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사실 조금 질려버려 뭔가 다른 것을 그리고 싶었는데. 내 실력으로 잘 표현해 낼 수 있을 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런 곳을 그린다는 자체만으로도 매우 즐거운 일이 될 것이 틀림없어. “분명 좋아하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외치고 말았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냐! 이건...정말 근사하잖아! 이런 곳을 어떻게 안 거야?” “어제 걷다가...” “아...” 그럼 블레탈이 뛰쳐나간 그 때...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감탄했다니. 흥분은 이내 곧 수그러들어 버리고 죄책감에 중얼거리듯 이 말만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해.” “아니요. 노예인 저보다 중인인 그들을 신경 써야 하는 라인님의 입장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화가 났을 뿐.”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건가. 하지만 블레탈은 조각 같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한 점의 실망이나 분노 따윈 보이지 않는 미소. “절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뭐라 말 할 수가 없다. 고맙고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블레탈은 날 위해 중인인 알레그로에게 검까지 휘둘렀는데도 난 알레그로가 요구하는 중인으로서의 몸가짐 때문에 노예인 블레탈을 쫓아가 위로하지 못했다. 그런데 블레탈은 내가 알레그로와 하이드와 게임을 하며 어울리던 사이 추운 밖에서 이곳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게 보여주기 위해... “미안해.” “정말 미안합니까?” “응.” “그렇다면...” 블레탈이 짓궂은 표정을 지은 건 순간이었다. 깨달은 순간 난 블레탈의 손에 눈밭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로 밀려드는 서늘한 한기에 정신이 번쩍 나는데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니 블레탈을 올려다보고 말았다. 블레탈은 보통 때와 같은 무표정이 아닌 내 또래 남자아이들이나 지을 법한 얄궂은 미소를 지은 채 코웃음치고 있었다. “어제 밖에서 벌벌 떨면서 벼르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하지만 약간은 어색한 말투. 블레탈이 내게 장난을 치다니. 절로 치미는 기쁨에 나도 모르게 블레탈이 내민 손을 확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블레탈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처럼 눈밭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난 장난스레 눈밭에 드러누운 블레탈을 껴안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면 되잖아.” “그렇군요.” 블레탈의 나직한 웃음소리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다이엔이 하이드와는 다른 의미로 끔찍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다음날 새벽부터였다. 다이엔은 새벽부터 내 방에 찾아와 날 억지로 깨운 뒤 필수적인 예절과 관습을 내게 주입시키며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건 알레그로가 내가 익힐 책들을 빌려 온 오후까지 계속 되었다. “늑대 굴 에서 막 도망친 표정이군.” 알레그로가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영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딱히 말할 기력도 없다. 얼얼한 목을 잡고 탁자에 이마를 박았다. 새벽부터 기본적인 인사부터 시작해 식사 예절, 에스코트 등을 익히느라 지칠 때로 지쳤으니까. 그래도 예절이야 그럭저럭 익힐 만했지만 문제는 관습. 뭐 그리 쓸 때 없는 상황에 주절거려야 될 말들과 행동들이 많은 건지. 생소한 이 곳 엘위론의 관습들은 평범한 한국인인 내게 어색하기만 할 뿐이라 외우는 데만 해도 장장 몇 시간이 걸렸다. 다이엔같은 엘위론인에겐 생활이고 일상이라지만 내겐 외울 거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차라리 내게 관혼상제의 차례를 외우라고 하지. “수업은 어땠지?” “말도 마. 예절이야 딱히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지만 엘위론의 관습 같은 건 하나도 아는 게 없어서 정말 힘들었으니까. 사실 캐롤 라인의 말투는 왕도에서 자란 사람들 보다 더 자연스러워서 무의식중에 같은 엘위론 사람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착각이었어.” “그럴 거야. 나도 저 녀석의 상식 없음에 놀라곤 했으니까.” “아무리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지만 이래서야 엘위론인이라기 보다는 외국인이나 다름없어. 그렇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다 외웠으니 일주일간 반복만 한 번씩 해 주면 다 익히게 될 거야.” “들었지, 캐롤라인? 어서 일어나. 이것 외에 익힐 게 더 많아. 갈 길이 멀다고.” 알레그로의 재촉에 별 수 없이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지. 허리를 일으키는데 알레그로가 불쑥 두터운 양장본의 책 몇 권을 내밀었다. “외국에서 살다 온 네게 부족한 지식이라면 역사와 지리일 게 분명하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니까 조심히 읽도록 해.” “그럼 지금부터 이걸 가르치면 되니?” 다이엔의 하얀 손이 책을 중간에서 집어 드는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다이엔은 지치지도 않나? 그 때 알레그로가 날 억지로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아니. 지금은 이 녀석의 옷을 맞춰야 해서 바빠. 들어오시죠!” 밖에 누가 있었나? 알레그로가 외치자 방문이 열리더니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순박하게 생긴 남자는 들어오자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의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노마 자인이라고 합니다.” “예, 반갑습니다.” 그 손을 잡고 마주 인사하는데 중간에서 알레그로가 끼어들었다. “이 녀석 이런 곳에서 한심하게 지내고 있긴 하지만, 사실 엄청난 도련님이니까 잘 만들어줘야 할 겁니다, 노마 자인씨.” “하하.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외엔 뭐라 할 말이 없네요 ” “그럼 난 내 방에서 쉬고 있을게.” 다이엔은 책을 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고, 난 그 때부터 꼼짝없이 옷을 벗고 이리저리 줄자에 감기는 신세가 되었다. 단순히 키와 가슴둘레, 엉덩이둘레만 재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팔 둘레부터 시작해 별별 것을 다 재는 게 아닌가. 옷가게를 갈 때 마다 겪은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아마 ‘예복’이라서 그런가. 정말 의류 공장이 있는 한국이 그립군. 치수를 재고 난 뒤에는 노마자인씨의 디자인 북을 보고 내가 입을 다자인의 옷과 색상, 옷감의 종류를 골랐다. 그렇게 모든 게 다 정해지고 나서야 노마자인과 알레그로는 이제 가 보겠다는 말을 했다.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않을래?” 벌써 가다니. 저 녀석이 가면 꼼짝없이 또 공부만 해야 할 텐데. “조금이라도 쉴 시간을 늘리려는 네 노력은 가상하다만... 보다시피 나나 노마자인씨는 어두워지면 이곳에 꼼짝없이 갇혀야 하는 입장이라서 말이야. 게다가 우린 아주 바쁘다고.” “신년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서 주문 때문에 바빠서 말이죠.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약간은 빠르면서 절도 있는 노크소리에 누군지 알아버려 당황하고 말았지만 들어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 블레탈은 흐트러진 보라색 머리카락사이로 아름다운 보라색 눈을 살벌하게 치뜬 채 알레그로를 노려보았다. 둘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할 겨를도 없이 노마자인씨가 탄성을 흘렸다. “굉장히 잘 생긴 분이군요. 마치 책에 나오는 천신처럼.” 노마자인의 눈은 황홀한 것을 본 마냥 블레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인데. 블레탈을 데리고 방 밖으로 피하려고 하는데, 알레그로가 입 꼬리를 올렸다. “지금 가야 할 이유가 또 늘었군. 노마 자인씨 가시죠.” “예. 그런데 저 분은 예복 안 맞추시는지?” 알레그로는 등도 돌리지 않은 채 들으라는 듯이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저 놈에겐 귀한 예복이 필요 없답니다.”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자꾸 아쉬운 듯 블레탈을 힐끔거리던 노마자인씨는 알레그로의 뒤를 따라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난 알레그로가 ‘저 놈은 노예니까 귀한 예복 같은 것을 입을 입장이 못 된다’라는 의미로 빈정거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알레그로 녀석, 사람 상처 주는 말 따위나 하다니. 블레탈은 알레그로가 나간 문을 그 후로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신경 쓰지 마.” 블레탈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니 블레탈은 조금은 다소 기분이 풀린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저런 말에 상처받지는 않습니다. 전 날 때부터 노예였으니까. 그러니 라인님도 제가 노예로 대접받는다고 해서 상처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알레그로를 노려봤던 거야? 분하니까 그랬던 거 아냐?”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정말 모르겠냐는 듯 날 가만히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도통 알 수 없다. 포기하고 블레탈에게 가르쳐달라고 말하려는데 그 눈빛이 매우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광폭한 겨울바람을 억지로 자수정에 가둬 놓은 듯, 그 때 블레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씹어뱉는 듯한 말. “마음대로 아까 전의 그 놈을 죽이지 못하니까요.” 맙소사.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돼.” “그 녀석은 느낌이 나쁩니다.” “블레탈!” 물론 블레탈은 알레그로를 미워할래야 할 수 밖에 없지만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하다니. 작게 가슴에 퍼지는 실망감을 느끼며 난 되는 데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쨌든 블레탈을 이해 시켜야 하니까. 나도 맨 처음에 만났을 때, 아니 사실은 지금도 알레그로가 재수 없다, 하지만 사람 성질 긁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서 날 도와줬던 게 그 녀석이다, 그 날일은 녀석이 상당히 과격하긴 했지만 녀석의 방식으로 내 어리석음을 깨쳐주려 한거다...이런 말을 내게서 한 참 듣고 있던 블레탈은 내게 차게 물었다. “확신합니까?” “뭐?” “정말 순수하게 라인님을 깨쳐주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는 걸.” “알레그로는 순간의 감정으로 살인자가 되기엔 너무 냉정한 놈이야. 난 그걸 알아.”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다. 알레그로는 날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날 죽일 특별한 이유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녀석은 날 도와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물론 지금도 어째서 날 도우려 하는 것인지는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유야 어쨌건 난 알레그로가 상당히 공을 들인 녀석인 것이다. 공든 탑을 제 손으로 무너뜨릴 리야 없지. 그런 내 상념은 블레탈의 말에 깨지고 말았다. “제가 카바예란일 때 ‘우슬론’이라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찾아보게 된 거지만 카바예란은 무투회를 위해 길러진 노예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크게 국가에 소속된 카바예란과 개인에게 소속된 카바예란으로 나뉜다. 무기를 다루는 노예이니 만큼 일반 노예보다는 높은 위치라고도 볼 수 있는데 블레탈은 전에 자신이 카바예란이라고 한 이 후로 처음,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놈은 먼 남부에서 흘러온 것이 분명한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는데 녀석의 무기는 철퇴였습니다. 철퇴로 사람을 때리게 되면 맞는 사람의 몸 한구석이 으깨지거나 박살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지레 놀라버려 꺼리는 무기 중 하납니다. 살상력은 뛰어나지만 그래서 다들 꺼려하는 무기죠. 그런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은 피에 미친 놈 아니면 지독하게 냉정한 놈,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람을...죽인단 말이야?” 왠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블레탈은 그런 내가 정작으로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는지 내가 차마 내뱉지 못한 질문에 답했다. “무투회 중에 상대방을 죽이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때때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엔 처벌을 받게 되죠. 저도 사람을 죽였습니다.” 직접 듣는 것과 상상하는 것은 역시 충격이 틀리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새삼 블레탈이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다. 눈앞에 살인자가 있다면 꺼려해야 정상 일 텐데. “우슬론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놈의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치 않는 냉정함과 무엇보다 철퇴를 다루는 것의 강점에 우슬론과 맞부딪히는 녀석들은 맥을 못 추고 패배했습니다.” “강점?” “철퇴는 매우 두꺼운 쇠뭉치이기 때문에 검과 맞부딪히면 쉽게 검날이 상하고 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퇴에 맞으면 뼈와 살이 으스러질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에 대전자들이 쉽게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겁니다. 냉정한 우슬론과 공포감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상대방. 결과는 당연한 것이죠.” 그렇구나. 마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같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우슬론은 어느 날 자기의 허리만큼 밖에 안 되는 키를 갖춘 소년에게 죽고 맙니다.” “그 녀석이 매우 강했나보지?” “아니요. 그 녀석은 그 날이 첫 경기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녀석이 우슬론에게 뭐라고 말했더니 우슬론이 이성을 상실하더군요. 우슬론은 평소와는 달리 완전히 흥분한 채로 그 녀석에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었죠. 순식간에 일어난 믿기지 않는 일이라 저 뿐만 아니라 경기를 준비하고 있던 카바예란들은 모두 넋을 잃고 우슬론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우슬론의 죽음.” “......” “평소의 우슬론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습니다. 냉정한 사람이 한 번 흥분하니 철퇴를 휘두르는 폼도 몸놀림도 미친 황소보다 못하더군요. 소년이 대체 뭐라고 했는지는 그 후의 경기에서 우슬론과 친하던 다른 카바예란이 소년을 죽여버리는 바람에 묻혀 버리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 때 일로 냉정한 사람이 한 번 흥분하면 평소 감정적인 사람보다 그 감정에 더 휘둘리게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통제를 못하는 겁니다.” 내가 알레그로의 어떤 부분을 건드려서 그 날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는...그런 소리야? “별 다른 말을 한 적 없어. 알레그로에게 욕설 같은 것을 내뱉은 기억도 없고.” “라인님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어떤 부분이 그 녀석을 화나게 할 수도 있죠. 무엇보다 그 자식은 검을 다루는 데 영 서툴렀습니다.” “무슨 뜻이야?” “검은 위험한 물건이라 숙련자도 자칫 다루다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대련을 할 때 목검을 쓰는 건 그런 이유에섭니다. 그런데 그 녀석은 검을 다루는데 영 미숙하더군요. 물론 칠 년간 검을 휘둘러왔던 저와 비교해서도 안 되고, 또 나중에 그 놈이 이성을 찾으면서 차차 나아지기는 했지만 결코 라인님을 ‘의도적으로 위협해’ 뭘 깨닫게 해 줄만한 실력은 아니었습니다. 자칫하다간 검을 잘못 휘둘러 라인님을 다치게 할 수도 있는 실력이었죠.” 말문이 막힌다. 정말 날 칼로 위협한 녀석이 검에 미숙했다면... 나도 모르게 목에 남은 칼자국을 손으로 만지고 말았다. 오싹 돋는 소름과 함께 머리가 팽글팽글 어지럽다. “순간의 감정을 주체 못 해서 라인님을 해하려 했던 사람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긴 그만하자.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만...어쨌건 난 살아있고, 알레그로가 날 죽이려 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네 말이 맞다 치더라도 우발적인 일이지 날 죽일 목적으로 알레그로가 검을 휘둘렀다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알레그로가 날 정말 죽이려고 했을 리가 없지. 내 말에 블레탈은 상당히 불만스러운 듯 눈썹을 살풋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차 노크소리와 함께 다이엔이 들어왔다. “네 하인이 식사 준비가 다 되었데.” “그래?” 아, 잠깐. 어제야 다이엔이 점심, 저녁 자느라, 그리고 오늘 아침, 점심은 다이엔이 자기 방에서 먹겠다고 해서 블레탈과 같이 먹었지만... 이렇게 되면 다이엔이랑 식사를 해야 하니까 블레탈과 같이 먹을 수 없는 노릇인데.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블레탈의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블레탈, 난 다이엔과 식사를 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식사해. 내 흐린 말 끝의 의미를 짐작했는지 블레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다이엔이 불쑥 끼어들었다. “상관없어.” “뭐?” “난 아침, 점심처럼 내 방에서 혼자 먹을 테니까. 그걸 말하러 왔어. 그러니 저 사람이랑 같이 먹도록 해. 그럼 한 시간 뒤에 봐.”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다이엔은 내 방 문을 닫고 나갔다. 마치 그 모습이 ‘난 네 과외만 아니라면 볼 일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듯해서 마음이 가라앉는다. 하긴,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알레그로의 반 억지로 내 과외를 떠맡게 된 거니까 기분 좋을 리 없겠지. 나도 잘 모르는 여자애와 단 둘이 식사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쌀쌀맞은 분위기라니. 그 때 내 어깨에 손이 올려졌다. “식사하러 가시죠.” 여느 때처럼 서늘하고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 마음이 가라앉는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시기적절하게 상념을 끊어준 블레탈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방을 나섰다. 과외 첫 날 하루 종일 혼자서 식사를 한 다이엔은, 그 다음 날도 혼자서 밥을 먹겠다며 자기 방으로 음식을 가져 올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되자 한, 두어 번 같이 먹을 것을 권유하던 나도 포기하고 다이엔을 빼놓은 채 블레탈과 함께 식사하기 시작했다. 다이엔은 나와의 과외 수업 내내 공부에 관한 말만을 한 채 일체의 농담이나 사적인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맨 처음에는 싸늘한 분위기에 좀 어색했지만 곧 제 할 일만 마치고 방으로 곧장 들어가 버리는 다이엔에게 익숙해져서 편하기까지 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왠지 볼 때 마다 나에게 주근덕거리던 하이드와의 괴리감이 느껴져 ‘진짜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신년제는 곧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다이엔은 너무나 책임감이 넘치는 선생님이었기에 난 사실 벼락치기라고 치기엔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일주일 내에 익히게 되었다. 덕분에 매일같이 밀려오는 피로감속에 뻑뻑한 눈을 비벼대야 했지만 이제 이것도 오늘로 끝. 다행이지만 내일 있을 ‘신년제’를 생각하면 아직도 불안한 게 사실인데... 미간을 찌푸리며 탁자 앞에 앉아있는데 다이엔이 들어왔다. 그런데 왠지 안색이 흐릿한 게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나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오늘은 수업을 하지 못하겠어.” “다녀올 데라니?” “집.” 아, 잊고 있었는데 다이엔에게도 집과 부모님이 있지. 하이드와 꼭 다른 사람 같아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유명한 무가인 ‘사욘’가의 자식이니까. 그러고 보니 일주일이 거의 다 되었는데... “혹시 다시 하이드로 변하는 거야?” “그래. 이미 놈의 역겨운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으니까. 너한테는 좋은 일일 테지?” 또 다른 자신인 하이드를 이용하려는 내 속내를 알고 있는 걸까. 하이드의 힘을 빌리기 위해 녀석과 신년제에 가야 하니. 왠지 불편하기도 하고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어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신년제에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까 예복을 가지고 올게.” “그것 때문에 집에 가는 거로구나.” “그런 녀석을 집에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내일이 당장 신년제이기도 하고. 그러니 ‘나’로 있을 때 집에 들렸다와야지.” 다이엔의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무시하고 다이엔을 따라 집 밖으로 나왔다. 마구간으로 간 흄이 말고삐를 붙든 채 다이엔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있는데, 멀리서 말의 푸흐흥 대는 소리와 요란한 바퀴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숲 길 너머로 시선을 주니 곧 화려한 외양의 낯익은 마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게 보인다. 의심하고 말 것도 없이 에스트라의 마차로군. “좋은 아침이에요 캐롤 라인.” 여느 때처럼 햇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게 마차에서 내려선 에스트라는 노란 모피로 된 목도리에 고급스레 수놓아진 종아리까지 오는 갈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하게 내게 내밀어진 손등에 입 맞춰 주고 나니, 다이엔이 대충 에스트라의 신분을 짐작한 듯 내 옆에 와서 섰다. 그러자 에스트라가 푸른 눈을 다이엔에게 돌렸다. “어머, 이쪽 분은?” “사욘 다이엔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사욘 다이엔. 전 코텔 가의 에스트라라고 해요.” 에스트라가 내민 손등에 다이엔이 입을 맞추고 나자마자 에스트라가 부담스레 눈을 반짝였다. “혹시 캐롤 라인의 애인인가요?” 무슨 황당한 소릴. 내가 고개를 내저을 틈도 없이 다이엔이 단호하게 ‘아뇨.’라고 답하자 에스트라는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도도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손님을 밖에 세워 둘 생각은 아니겠죠?” “난 괜찮으니 에스트라님을 모시고 집으로 들어가. 코델 에스트라님, 그럼 이만.” 다이엔은 에스트라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더니 곧 말이 세워져 있는 쪽으로 향했고, 난 별 수 없이 에스트라, 그리고 언제나 그녀와 함께 붙어 다니는 두 명의 호위검사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뭣 때문에 왔는지 알지만 예의상 물으며 빨갛게 만든 꿀 탄 우유를 에스트라에게 건넸다. 양쪽에 앉은 두 사내에게는 그냥 꿀만 탄 우유를 건네고 말이다. 에스트라는 환한 얼굴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모아 쥐었다. “신년제가 내일이잖아요? 그래서...” 에스트라는 들고 있던 백에서 포장되어 있는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붉은색 포장지로 예쁘게 싸인 작은 상자였다. 이건 왜? 에스트라는 장밋빛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으며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캐롤 라인. 아직 새해가 되려면 이틀 남았지만요.” 아, 그렇구나. 새해선물. 여기 온 본 목적은 블레탈인 게 뻔하지만 내게도 신경 쓴 게 조금은 고마워졌다. “감사합니다.” 선물을 받아들자 에스트라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역시나 블레탈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말하길, “캐롤 라인을 만나는 김에 블레탈에게도 새해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안 보이네요?” 그게 아니라 블레탈을 만나려는 김에 내게 새해 인사를 한 거겠지. 그렇게 속이 다 드러나는 태도로 그런 말을 해 봤자, 네 호위들의 불만스러운 눈빛이 어떻게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고생하며 왕도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안 된 일이지만, “블레탈은 왕도에 갔습니다.” 다이엔이 내 집에서 손님으로 지내고, 또 중간 중간 알레그로가 와서 식사를 함께 하고 간 탓에 식료품이 거의 바닥나버렸으니까. 그에 에스트라의 얼굴에 아쉬운 듯한 표정이 스쳤다 사라졌다. “별 수 없죠, 그런데 캐롤라인은 신년제 때 뭐해요?” “모임에 참석해야 합니다.” “혹시 시간이 남는다면 사촌오빠가 주최하는 모임에 나오지 않을래요?” 훼아라스가? 머릿속에 화려한 금발의 호쾌한 청년이 스쳐지나가는 가운데 에스트라가 초대장으로 보이는 것을 내게 내밀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빠가 전과 같은 일은 없을 거라고 전해 달라던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냥...사소한 시비가 있었습니다.” 그 날일을 갑자기 떠올리니 또 다시 어금니가 악물려진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이렇게 얼버무리고 있는 내 자신이 비참하다. 난 열지도 않은 초대장을 다시 에스트라에게 밀어주었다. “훼아라스님께는 감사하지만 참석하지 못 할 듯 싶습니다. 이번 신년제는 왕도 중인계에 제가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자리니까요.” “아, 맞아. 캐롤 라인은 왕도 출신이 아니지. 세련된 말투 때문에 자꾸 깜빡 잊네요. 중인 사교계에 첫 데뷔하는 자리라면 이것 저것 준비할 게 많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에스트라는 일단 가지고만 있으라며 다시 초대장을 내 쪽으로 밀었다. 결국 그것을 받아 들게 되고 보니 기분이 묘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난 지금 너무나 약하니까. 무시 당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기르게 되면 그 때는 귀족들 앞에 설 수 있겠지. 약 십분 간을 그렇게 담소로 보내고 나니 에스트라는 바빠서 그만 가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갑자기 발그레 볼을 붉히며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그런데 캐롤라인.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거북스레 눈을 빛내며 뜸을 들이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에스트라가 다음에 내뱉은 말은 그녀의 맨 뒤에서 마저 남은 우유를 들이키던 사내가 순간 컥 거릴 정도의 말이었다. “저 블레탈과 밤을 보내고 싶어요!” “!” 이, 이런. 얼굴이 절로 붉어지는 느낌에 아무 말도 못한 채 청순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금발의 미소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외모만으로 따지면 특급의 미소녀인 에스트라가 앞에서 ‘나 누구랑 자고 싶어!’라는 말을 당당하게 했으니, 순간 머릿속에서 포르노 저리가라 급의 동영상이 스쳐지나간 건 당연하잖아?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뒤의 두 호위무사들의 얼굴도 순간 어색하게 굳었다. 그런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에스트라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갑자기 얼굴을 확 붉히며 화난 듯 외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신년제 밤을 블레탈과 와인이라도 하며 로맨틱하게 보내고 싶다는 이 소리였어요. 이제 보니 캐롤 라인도 의외로 응큼한 구석이 있네요.” 그런 뜻이라면 어휘선택을 잘 했어야지 날 변태마냥 몰아세우다니. 남자 가 그런 말을 들었으니 당연히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하고 싶지만 대꾸했다가는 진짜 변태로 취급받을 것 같아 그냥 별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뭐, 미운 여자애지만 에스트라의 정성이 갸륵 해서라고나 할까. 블레탈도 재미없게 집에만 있는 것 보다는 에스트라와 노는 게 재미있을 테니까. 그리고 신년제(이틀. 일년의 마지막 날과 신년, 이렇게 이틀로 이루어진다.) 마지막 날이 돼서야 난 집에 돌아올 수 있을 테니. “어어, 정말요?” “...왜 그런 표정을 하십니까?” 에스트라는 잔뜩 놀란 표정을 한 채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그야 당신은 제가 블레탈과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요. 절 좋아하지도 않고. 그래서 분명 허락받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둔해서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당황해있든 말든 에스트라는 환히 웃더니 ‘그럼 내일 올게요.’하고 외치며 내 집을 떠났다. 에스트라의 마차가 떠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왠지 찝찝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 때 저 멀리에서 또 다른 마차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에스트라의 마차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날렵하고 실용적으로 생긴 이 두 마차. 숲길이라서 넓지 않기에 이 두 마차는 에스트라의 마차에게 먼저 길을 양보하더니, 에스트라의 마차가 지나쳐 가자 그제야 다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하고 보고 있는데, 마차가 내 앞에 서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안에 앉아 있는 건 알레그로였다. “타!” “뭐?” “왕도에 미리 있어야 내일 편할 거 아냐? 예복이 잘 맞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얼른 타라고.” 신년제. 매년 일년의 마지막 날과 일년의 첫날, 그렇게 이틀 동안 이루어지는 엘위론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다. 그 성대한 축제가 이루어지는 아침이라 거리는 온통 축제분위기로 들썩이고 이미 축복을 기원하러 나뭇가지를 들고 사당으로 가는 사람들로 메워지고 있었다. 엘위론인은 특유의 현실적이며 비판적인 국민성 때문에 종교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축제날에는 그렇게 하는 게 일종의 풍속이었다. 그 모습을 창밖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청년 데스텐은 곧 자기 앞의 그림에 시선을 가져갔다. 그 그림에는 숱한 흑색의 연필 선으로 이루어진 곧장 살아나올 듯한 여자가 얼어붙은 호수를 배경으로 애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림을 모르는 일반 사람이 봤다면 그저 ‘잘 그렸구나’할 정도의 그림이지만 화가로서 발을 내딛은지 이 년이 되는 데스텐의 눈에는 그 그림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 들어왔다. “캐롤라인이라고 했었지.” 섬세한 명암과 사실적인 묘사. 놀라운 점은 하찮은 배경까지도 인물에 같이 우러나온다는 것과 그 여자가 어느 신화에 나오는 그런 인물이 아닌 평범한 여자인 게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여자는 완벽한 미적 비율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살아있었고,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니? 헛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미적 기준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아직도 많은 학자들이 논쟁을 펼치고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그 미의 절대적인 가치를 쫓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 기준을 무시하는 그림이라니? “단순한 초상환가...” 허나 초상화라고 치기에는 배경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호수가를 배경으로 서 있는 여자,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테마를 지닌 작품인 것이다. 그렇지만 대체 신화나 영웅을 그린 것도 아니고 미의 황금률도 따르지 않은 그림을 무슨 생각으로 그린 거지? 덕분에 이 그림을 스승인 그리요가 친분 있는 화가나 제자들 앞에 내놓았을 때 그들 사이에선 말들이 분분했다. 어떤 화가는 미적 기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애송이가 그린 것이 틀림없다는 혹독한 비판을 했지만, 한 쪽에서는 새로운 미적 세계를 여는 그림이 틀림없다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보냈다. 그림의 여자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초상화라는 건 화가로 취급받지 못하는 하찮은 평민의 그림쟁이들이나 그리는 것이기에 뛰어난 명암과 원근감으로 표현된 그림이 한낱 초상화로 취급받기엔 괴리감이 심해서, 화가들 중 몇은 ‘혹시 호수의 요정이나 어느 이야기 속 여인을 그린 게 아니냐’하는 의견을 내었다. 사실 평범한 여자를 그려봤자 뭐하겠는가. 어쨌든 사람 여럿 헷갈리게 하는 그 그림은 유머감각이 탁월한 화가인 에비츠가 장난삼아 ‘알 수 없는 미녀여 정체를 드러내시오!’라고 한 덕에 ‘알 수 없는 미녀’로 불리게 되었다. 미적 비례에 맞는 여성의 그림은 아니지만 여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하는 그런 맛을 가진 묘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으니, 알 수 없는 미인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데스텐이 초상화를 눈여겨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뭐야, 그 그림은?” 그런 데스텐의 옆으로 오래된 지기인 피엘이 다가왔다. 선천적인 지독한 난시로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피엘은, 극장에 단막극을 써 주고 있는 가난한 신예 작가였다. 붉은 앞머리가 그림에 닿을 정도로 눈을 바싹 그림에 대어 보던 피엘은 ‘잘 모르겠지만 네 그림은 아닌 거 같은데?’하고 말했다. 데스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스승님이 칭찬을 하던 그림이야. 화가들이 한동안 얘깃거리로 삼았던 그림이지.” “그렇다면 네 스승 화실에 있어야 할 그림인데 왜 여기 있냐?” “그 화가가 신년제에 올지도 모른다고 스승님이 옮겨 두랬어.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난 잘 모르겠는데 대단한 그림인가봐? 누가 그렸는데?” “캐롤라인.” “캐롤라인? 캐롤라인이라고 했어?” “알아?”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란 표시를 잔뜩 내는 피엘의 모습에 데스텐이 되묻자 피엘이 극성스레 외쳤다. “당연히 알지! 너 하인상회에 엄청난 자금을 예치해 두었다는 익명의 부자 얘기 들어봤지?” “응.” “그 사람의 손자가 캐롤라인이라는 녀석이래. 맞든 어쨌든 녀석은 엄청난 부잔데 그 돈으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린다던데?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이 왕도에 온 지는 좀 되었는데 그 녀석을 봤다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 어디서 일하거나 공부한다면 얼굴 마주치게 되는 게 정상아냐?” 물려받은 돈으로 놀고먹는 쓰레기라니. 데스텐은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초록색 눈으로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흑백의 명암으로 이루어진 정적에 찬 호수와 애련한 미소를 띤 여자는 도저히 한낱 한량의 손에 그려졌다고 보기엔 믿기지 않는 감이 있었다. “아, 그래. 봤다는 사람이 있긴 하다.” 피엘은 얄궂은 미소를 짓고는 신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가슈 녀석이 그러던데 그 녀석이 귀족들의 모임에 왔었데.” “귀족에게 돈을 대 주는 거야?”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닌 거 같다던데. 귀족 아가씨 하나가 그 녀석에게 홀랑 빠졌다고 하거든. 그것도 엄청난 미소녀가 말이야.” 무슨 소리지? 데스텐이 가는 눈썹을 모으자 피엘은 더 신이 난 듯 떠벌 댔다. “그렇게 뛰어나게 잘 생긴 건 아닌데 묘하게 사람을 끄는 녀석이래.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다는 건가? 하여튼, 그 덕인지는 몰라도 귀족아가씨의 사촌 오빠와 그 친구와 함께 모임에 나왔다고 하던데. 큭큭. 중간에 봉변을 당해 돌아갔지만 말이야.” “봉변이라니?” “중인인 그 녀석이 모임에서 설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 귀족이 망신을 줬다던데. 녀석은 화가 났는지 중간에 가버리고. 꼴 좋지 뭐! 중인 사교계엔 인사하러 오지도 않은 녀석이 귀족들의 모임에 뭣 하러 가? 쥐새끼가 곰 굴 앞에서 어슬렁댄다고 곰이 되나?” 그렇게 말하는 피엘의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피엘은 귀족들을 싫어하는 중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신분상으로는 어쩔 수 없이 귀족들 밑에 있기에 대놓고 드러내진 못했지만, 별 다른 특별한 능력도 없는 무능한 귀족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것에 불만을 품는 중인들이 많았다. 능력을 중시하는 중인들일수록 무능한 귀족들을 경멸했고, 더 높은 곳으로의 사회적 진출을 막는 귀족들에게 보이지 않는 적의를 품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붙잡고 있다니, 이상한데? 너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잖아?” “이 여자, 내가 아는 녀석이랑 닮았어.” “누구?” “넌 모르는 녀석이야.” 게다가 삼년 전에 죽은 녀석이다. 보면 볼수록 녀석과 이목구비나 눈매가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데스텐에게 피엘이 말했다. “그림 속 여자한테 반해서 어쩌려고. 그보다 우린 바쁘지 않아 친구?” 유쾌하게 눈을 찡긋거리는 피엘의 모습에 데스텐은 피식 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그림 속 여자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피엘의 말대로 지금은 신년제 준비를 거드는 게 급하니까. 샘 노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원래 신년제엔 쉴 수 있고, 축제 때 남은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번 신년제는 평민가정에서나 누릴만한 명절 분위기를 손주뻘 되는 녀석들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점이 그를 기쁘게 했다. 노예라는 게 가정을 꾸리기도 힘들고, 설사 자식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자식도 곧 알 수 없는 곳으로 팔려가기에 대부분의 노예에게 안온한 가정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샘노인은 말년에 얻은 이 안온함이 너무 좋았다. 늙은 노예의 주름진 손은 찰진 밀가루를 조물락거려 거기에 채 썬 고기를 넣길 반복했다. 젊은 시절에 어느 중인가문에 들어가 주방에서 이것 저것 일을 했던 게 말년에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사실, 어깨너머로 배웠던 것을 지금 와서 흉내 내어 보는 거라 완벽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피로그’라 불리는 이 빵은 명절 때 마다 먹던 거곤 하기 때문에 맛은 대충 맞출 수 있었다. 대충 반죽을 입에 털어 넣어 생채로 맛을 본 샘노인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요 녀석들! 아직 덜 되었냐!” “지금 가요!”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장작을 가득 든 흄과 커다란 바구니를 든 피에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흄은 장작을 불이 타는 아궁이에 집어넣기 시작했고, 피에는 커다란 솥에 바구니에 들어있던 노랗고 허연 것들을 집어넣었다. 그건 고기의 비계를 녹여 굳힌 버터였다. “주인님이 안 계시는데 이렇게 음식을 해도 괜찮을까요?” 피에는 걱정스런 낯빛을 했다. 이번 주인님은 자신들에게 잘 대해 주시는 분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자신들은 노예인 것이다. 노예가 귀한 음식들로 멋대로 축제분위기를 낸다니, 자신의 경험으로 보면 이미 경을 쳐도 단단히 칠 일이었다. 샘은 그런 피에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껄껄. 걱정 말거라. 주인님이 명절이니까 이리하라고 하셨단다.” “주인님이요?” “맘껏 음식도 만들고, 먹고, 놀기도 하라고. 어쿠, 기름이 녹는다 얼른 집어넣자!” 피에는 그제야 안도한 듯 웃으며 샘 노인과 함께 반죽한 피로그를 기름 솥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흄은 코를 벌름거리게 하는 음식 튀기는 기름 냄새를 즐기며 활활 타는 아궁이를 싱글벙글한 얼굴로 보고 있다가 갑자기 얼굴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주방을 나왔다. 하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방으로 들어가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주인님 방에 있나?’ 주인님과 친한 블레탈님이라면 그럴 거야. 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층계를 밟았다. 주인님의 방은 주인님 스스로나 블레탈님만 관리를 하는 탓에 딱 한번, 그것도 아주 잠깐 안을 들여다 본 적 밖에 없었다. 블레탈님을 부르는 핑계로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에 흄은 주인님의 방 앞에 다다랐을 때,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벌컥 열었다. 노크를 하면 안을 못 볼 지도 모른다는 약삭빠른 생각에서였다. “블레탈님, 같이...” 음식을 만들어요라고 외치려던 흄. 하지만 흄은 곧 뻣뻣이 굳을 수 밖에 없었다. “씹...조용히 문 닫아.” 자신을 찢어발길 듯한 살벌한 보라색 눈동자 위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슴이 덜컹거릴 정도로 섹시한 모습. 허나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의 잘 생긴 얼굴엔 미처 배출하지 못한 열기가 서려 있어 흄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등을 돌려 문을 닫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붉은 색의 이불과 주인님의 침대에 누워있는 블레탈. 이 쯤 되면 둔한 흄이라도 블레탈이 뭘 하고 있었는지는 알아 챌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블레탈님이 주인님을...그랬구나!’ 문 쪽으로 등을 돌린 채 흄은 블레탈의 행위가 끝나길 기다렸다. 흄의 귀로 열기에 젖은 블레탈의 신음소리와 간간히 ‘라인’하고 부르는 색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올 때 마다 흄의 마음은 조마조마해 졌다. 부끄럽다거나 민망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노예들은 집단생활을 하는 만큼 남의 성행위를 보는 것이 예사이므로 - 주인님의 방, 그것도 침대에서 저래도 될 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초조하게 일 분 쯤 기다렸을까 나른하게 잠긴 블레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멋대로 라인님 방에 들어온 거지?” “블레탈님이 여기 있을까봐...같이 음식 만들자구요.” 등을 돌리자 흄의 눈에 침대에서 내려와 잔뜩 인상 쓴 얼굴로 젖은 천 뭉치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는 블레탈이 들어왔다. 잔뜩 겁에 질린 흄에겐 그토록 궁금했던 주인님의 방안, 우아한 사각 문양이 새겨진 연 갈색의 두터운 커튼이라던가 맨들맨들 빛이 나는 고급 목재로 된 탁자와 의자라던가 푹신하게 발목이 잠길 정도의 카펫 따위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흄에게 순간 블레탈이 천 뭉치를 던졌다. 흄은 엉겁결에 그것을 손으로 받고 나서 인상을 쓰고 말았다. 축축한 것이 손에 느껴졌으니까. “빨아.” “엑?” “허튼 소리 지껄이면 알지?” 자기가 잘못한 건데 왜 내가! 흄은 뭐라 항변하고 싶었지만 곧 블레탈의 살벌한 눈빛에 질려 밖으로 도망치듯 튀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흄의 뒤꽁무니를 벌레 씹는 듯한 심정으로 쳐다보던 블레탈은 문이 닫히자 한숨을 내쉬며 쓰러지듯 침대위에 드러누웠다. ‘요즘 많이 쌓였었나.’ 라인님의 방에 신년 선물을 올려두려고 들어왔을 뿐인데. 블레탈은 주머니에 있던 작은 상자를 꺼내어 열어보았다. 열자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자수정으로 된 브로치가 반짝였다. 누굴 위해 선물을 사 본 건 처음이었다. 사실 개인적인 돈을 쥐어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노예에겐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쨌거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욕정 해 버리다니.’ 상자를 올려 두려다가 이불의 한쪽이 말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이 침대에서 라인님이 곤하게 잤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간 라인님이 나체로 신음을 흘리며 자신 밑에 깔려있는 야릇한 상상이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미처 황당해 할 틈도 없이 달아오른 몸. 아무리 라인님에게 팔린 이후 성행위를 하지 못해 욕구가 쌓였어도,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어릴 적에나 하던 손장난을 한 것도 허무한 데 그 꼴을 어리버리하게 생긴 놈에게 들키기 까지 했으니. 잔뜩 짜증나는 머릿속에 블레탈은 얼굴을 찡그린 채 머리를 헝클었다. 점점 자신이 이상해져가는 것 같았다. 원래는 라인님을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는 생각만 했었는데...이제는 그의 깨끗한 미소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져 버려 이젠 그런 생각은 희미해지고 말았다. 물론 그를 가지고 싶기는 하지만 그를 웃게 해 주고 싶고, 그와 함께 하고 싶다고나 할까. ‘내가 왜 이러지.’ 게다가 일 주일 전의 자신이 생각해도 무모했던 그 때의 행동이란. 라인님이 바닥에 쓰러진 채 알레그로라는 중인 녀석에게 칼로 위협 받고 있는 것을 본 순간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라인님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닥치는 아찔함과 놈에 대한 분노. 격정에 검을 휘둘러 라인님을 구하긴 했지만 상대는 중인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놈을 죽일 뻔 했다. 다시 생각해도 싸늘하게 피가 식는 기분에 블레탈은 한숨을 내쉬곤 침대에서 내려서 이불을 정리한 뒤 방을 나왔다. 그리곤 층계를 내려서 거실로 나오는데, 먼 밖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라인님?’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하는 생각에 집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알레그로라는 녀석과 라인님이 같이 외출했다는 것에 불안했는데 지금 왔다면 다행이다. 허나 블레탈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차가운 표정을 하고 눈 앞의 마차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건 여러 번 봤던 코텔가의, 에스트라의 마차였으니까. “블레탈, 잘 지냈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스트라님.” 블레탈의 변함없는 조각 같은 얼굴과 늘씬한 몸매에 에스트라는 얼굴을 붉혔다. 예전에 그녀가 선물해 줬던 화려한 옷도 기막히게 잘 어울려 블레탈은 도저히 한낱 노예라고 보기엔 어려운 감이 있었다. 에스트라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년 블레탈에게 장미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 신년제를 같이 보내자고 왔어.” 치솟는 긴장에 몸이 조이는 것 같다. 마차의 창밖으로 내다 본 ‘소시엠 회관’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큰, 색색의 벽돌과 화려한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고색창연한 건물이었다. 이제 곧 신년제가 시작될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이라 사방에서 마차와 말, 그리고 신년제 모임에 온 것이 분명한 중인들로 회관입구는 넘치고 있었다. 괜히 목깃을 조이는 검은 끈을 잡았다 놓았다 하고 있는데 알레그로가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하이드 자식. 곧 신년제가 시작될 시간인데 안 나타나고 뭐하는 거야.” 오늘 아침 알레그로의 집으로 온 하이드...아니, 정확히는 다이엔의 것이 분명한 전갈에는 회관 앞에서 만나자고 적혀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사욘가의 마차나 말 탄 하이드의 모습은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녀석이 오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초조함에 밖을 다시 샅샅이 살피고 있는데 알레그로가 ‘별 수 없군’이라고 중얼대더니 갑자기 마차 밖으로 내렸다. 엉겁결에 따라 내리니 알레그로는 성큼성큼 회관 입구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끼리 먼저 들어가자.” 할 수 없지. 알레그로와 함께 입구에서 초대장을 경비에게 보여주고 들어가자 깨끗하고 조금은 장엄한 구석이 보이는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모습을 조각한 건물을 받치는 기둥과 대체 어떻게 켰으리라고 짐작도 안 되는 홀을 밝히는 수많은 등불들. 멀리 양 쪽으로 휘어져 내려오는 두 계의 층계와 위로부터 이어져 온 바닥을 장식하는 색색의 대형 카펫. 그 화려함과 규모에 순간 기가 질렸지만 카펫을 밟은 순간 난 내가 의외로 초연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난 귀족가문인 다에론가의 저택에 가 본 적도 있었지. 그 때 뒤에서 엄청 커다란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우릴 잡았다. “제하 알레그로군!” “부회장님.” “껄껄, 금년도 여전히 시뻘겋게 입고 나타났군! 좀 다른 색 옷도 입지 그러나?” 알레그로와 잘 아는 사인가? 마치 털보 수염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는 더벅머리에 풍성한 구렛나루를 한 털털한 인상의 오십대 남자는 그 후로 잠깐 더 알레그로와 농담 같은 대화를 주고받더니 곧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 젊은 친군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왕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녀석이에요. 캐롤라인입니다. 이 쪽은 중인회의 부회장을 맡고 계신 허드슨 칼 씨야. 인사해.” “반갑습니다. 캐롤 라인입니다.” “나야 말로 반갑네! 자네가 캐롤 라인군이군. 언제나 오나 기다렸는데 결국 초대장을 보내게 만들더구만.” 무슨 소리지? 그 때 알레그로가 끼어들었다. “부회장은 왕도에 있는 회원...즉, 중인들의 관리를 맡거든.” “그럼 초대장을 이 분이...죄송합니다.” “이제라도 왔으니 됐네! 자네 조부이신 산타클로스 씨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이십 년간 중인회의 간부에 있었지만 그 양반이 모임에 참가한 걸 봤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네. 심지어는 사람을 보내 찾아간 적도 있었지만 번번이 안 계시더군.”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셔서...” 적당히 변명할 거리가 없어 애매하게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만 되면 썰매를 타고 세계를 날아다니는 할아버지니 썩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어쨌든 그 분이 돌아가셨다니 심히 애석한 일이로군.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꼭 보고야 말겠다며 벼르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그 할아버지 멀쩡하게 나랑 엘위론까지 와서 재산양도 서류 써 놓고 돌아간 사람인데. 언제 사망처리가 된 건지. 하지만 요 근래 알게 된 어이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산타할아버지의 짓들을 생각하며 난 납득하고 말았다. “아 참, 회비는 한 달에 은화 다섯 개라네.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니 때 먹을 생각은 추호도 말게!” 그 박력에 나도 모르게 ‘예’하고 답하자 칼씨는 그제야 만족한 듯 ‘난 바빠서 이만!’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런 칼씨를 보며 알레그로는 왠지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저거 나한테 하는 소리야.“ “뭐?” “세 달째 회비를 밀렸거든. 돈에 관해서라면 악착같은 사람이라 회비 안 내면 어찌나 닦달을 하는지, 그 때문에 우리 같은 젊은이들은 저 사람만 보면 슬슬 피하지.” “왜?” “버는 돈도 쥐꼬리 만 한데다 세금내기 바쁜데 회비 낼 여유가 어딨냐?” 짜증스레 그것도 모르냐는 듯 인상을 쓰는 알레그로라니. 이런 모습도 있었나? 전에 알레그로 집에 갔을 때 그렇게 못 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아무도 없었지. “너도 일하면서 독립해 사는 거야?” “독립? 열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굳이 독립이라고 할 것 까진 없는데.” 의외다. “그래도 아버지가...” “젖먹이일 때 어머니랑 이혼을 한 사람이야. 남이나 다름없지. 게다가 난 어머니의 성을 이었고 말이야.” 맞아, 엘위론에선 신분이 같은 남녀가 결혼하면 그 자식은 부모의 결정에 따라 둘 중 어느 한 쪽의 성을 이을 수 있다고 했지. 신분이 다른 남녀의 경우 무조건 낮은 쪽의 성과 신분을 잇게 되지만. “시간이 이쯤 되었으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거야. 나이든 사람들이야 네가 돈이 많은 어린 녀석이라는 것만 신경 쓸 테고, 또 아예 널 모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젊은이들 사이에선 네 악평이 이미 상당할 테니 각오 단단히 해. 반대로 너한테 빌붙으려는 놈들도 있겠지만.” “알았어.” “하이드 녀석이랑 같이 들어가면 좋겠지만, 내가 있으니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도발에는 응하지 말고 적당히 넘어가라고. 그리고 오늘은 일단 안면만 익히면 되니까.” 점차 적당한 긴장감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알레그로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넓은 연회장은 이미 멋있게 차려입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의 그룹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도에 있는, 심지어는 왕도 인근의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중인들이 다 몰려 들어왔다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 때 알레그로가 턱짓으로 한 쪽을 가리켰고 난 그 쪽에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대차이랄까, 아까 보았던 어른들과는 달리 예복이 다들 화려하다. 역시나 끼리끼리 모여 있었는데, 알레그로는 날 끌고 한 그룹의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며 속삭였다. “저 녀석들은 엘위론 중인 청년회의 간부들이야.” 위치가 위치인 이상 나에게 싸늘하게 대하지는 않겠구나. 두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다가가자 알아챈 듯 이야기를 멈추고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투표로 선출된 사람들답게 활달해 보였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연상으로 보여 조금 더 안심이 되었다. “요즘 모임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오랜만이다?” 그 중 짙은 붉은 머리의 여자 하나가 알레그로에게 아는 척을 하자 알레그로는 피식 웃었다. “나오면 회비 내라고 할 거잖아. 좋은 저녁입니다, 청년회분들.” “좋은 저녁이야, 제하 알레그로. 그런데 그 친구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푸른 머리의 남자가 웃으며 날 바라봤을 때 난 약간은 긴장한 채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습니다. 캐롤라인이라고 합니다.” 순간 굳어버린 남자의 표정과 조용해진 내 주변. 저희들끼리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일제히 날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귀에 잡히는 ‘캐롤 라인이라고?’,‘쟤가 그 녀석이래.’하는 수군거림. 각오는 했지만 상상이상으로 호의적이지 못한 분위기다. 게다가 구경꺼리가 된 듯한 이 꼴이라니. 남자가 내 손을 잡았다. “난 청년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반 라헬이야. 이 쪽은 부회장인 세드릭 루샤.” “반가워.” “반갑습니다.” 알레그로와 친해보였던 세드릭 루샤라는 붉은 머리 여자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 내 소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살가운 태도라 조금은 풀린 마음으로 악수를 하고 나서 남은 셋과도 악수를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런 건방진 녀석의 인사를 왜 받아주는 거지, 반 라헬?” “시드.” 날 차갑게 보는 잿빛 눈은 적의로 가득 차 있어서 묘하게 당황스럽고 불쾌하다. 내 소문을 가지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처음 보는 녀석까지 시비라니. 회장, 반 라헬은 그만하라는 듯 그 녀석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놈은 내게 성큼 다가왔다. “너 이 자식, 너무 뻔뻔한 거 아냐?” “무슨 소리지?” 태연스레 응수하니 녀석은 기가 차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왕도에 와서 중인계에 제대로 신고식도 하지 않은 새끼가 귀족들 옆에 살랑거리려다가 망신당하고 쫓겨났다며? 그렇게 귀족이 좋으면 계속 꼬리 흔들며 붙어있지 뭣 하러 이제 고개를 디밀어?” “시드, 그만해.” 주위로 하나 둘 씩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나와 시드의 싸움을 구경하는 게 뻔했다. 여기서 망신당하면 힘을 얻는 건 고사하고 중인계에도 발붙이기 어렵게 되겠지. 알레그로는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만 이렇게 되면 내가 생각해 둔 데로 할 수 밖에. 난 난감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말 해 줄래?” “이 새끼가 누굴 놀리...” “난 엘위론 출신이 아니라 정통 엘위론어가 아니면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어. 네가 타자리하어나 윔치스어로 말해준다면 가장 고맙겠지만.” 약간 당황한 듯한 시드와 밝혀진 내 출신에 수군거리는 주위 사람들. 그 때 알레그로가 때 맞춰 끼어들었다. “라인이 엘위론에 온 건 겨우 두 달 전쯤이니까 이 녀석에게 비속어를 남발하거나 비꼬는 말을 해 봤자 네 입만 아플 뿐이야.” “유학파건 뭐건 간에 중인이 중인 모임보다 귀족 녀석들의 모임에 먼저 얼굴을 디밀었다는 건, 같은 중인들을 무시하는 짓이야!” 젠장,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에스트라가 초대 운운할 때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안 가는 거였는데. 생각해보면 에스트라가 내 복잡하게 꼬인 상황의 원흉인 셈이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서 어쩌겠냐마는 다시금 치솟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주위에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알레그로에게 물었다. “무시했다니?” “네가 중인이고 엘위론에 온 이상 중인회에 먼저 얼굴을 비치고 소개하는 게 기본적인 예의거든. 그런데 넌 그 전에 귀족 모임부터 갔으니까.” 역시나 눈치 빠른 알레그로 녀석. 내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파악한 모양이다. 난 짐짓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난 중인회로부터 어떤 초대장도 받지 못했는데? 오늘은 신년제 초대장을 받았으니까 온 거고 말이야.” “꼭 오라고 해야 오는 거냐, 멍청아? 이사 왔으면 인사하러 먼저 오는 게 예의 아냐!” 시드라는 녀석이 잔뜩 화가 난 듯 내게 소리친 순간 일렁이는 동조하는 듯한 수군거림. 하지만 분명히 맨 처음과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어. 난 고개를 저었다. “주인의 초대 없이 찾아가는 건 무례야. 어째서 그게 예의라는 거지?” “너 바보냐!” “귀족 모임에 간 게 중인들을 무시하는 거란 말도 이해를 못 하겠어. 안면이 있는 귀족 아가씨의 오빠가 초대를 해 줘서 승낙했고, 간 것 뿐이야. 사실 여기가 고국이래서 왔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쓸쓸했으니까. 그래서 간 거였는데 졸지에 모욕을 당해서 기분만 상하고 돌아왔지. 그런데 여기서도 이런 꼴을 당하는 군.” “핑계 대지마!” “잠깐만요.” 그 때 아직 변성기에 접어들지 않은 남자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 쯤 되면 누군가 끼어 들 거라고 생각했지. 시선을 옆으로 하니 하얀 예복을 입은 짧은 은색 머리카락의 열 너 덧 살로 보이는 소년이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굉장히 똑똑해 보이는 인상의 소년은 시드와 나 사이에 서더니 날 보며 물었다. “어디에서 살다왔죠? 타자리하? 윔치스?” “최근까진 타자리하에 합병된 소일룬에서 살았어.” “중부권 출신이군요. 거기 계신 분.” 소년이 시드를 바라보자, 시드는 짜증스런 얼굴을 했다. “이건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제이 시드씨가 화를 내 봤자 소용없어요.” “넌 뭔데 끼어들어?” “중부에선 주인이 초대하지 않는 이상 남의 집이나 모임에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엘위론에선 초대장이라는 건 명목일 뿐이고 무작정 파티에 가도 상관없지만 중부에선 초대장이 없으면 바로 쫓겨나고 말구요. 그런 문화의 중부에선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오면 사교계나 모임에서 먼저 그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내는데, 아마 캐롤 라인씨가 중인회보다 귀족모임에 얼굴을 비친 건 그 때문일 겁니다. 중인회에선 초대장을 안 보냈고, 귀족들에게서 초대장을 먼저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이사 온 사람이 알아서 인사를 하러 집 주인을 찾는 엘위론과는 풍속이 다른 곳에서 온 캐롤 라인씨를 이해해 주자는 겁니다. 물론, 아무리 몰랐다지만 엘위론인으로써 사교계 첫 데뷔부터 이런 실수를 저지른 캐롤 라인씨도 반성을 해야 하구요.” 구경하는 사람들이 분위기가 좀 누그러진 게 느껴졌다. 분명 ‘저 녀석은 외국에서 살다 와서 엘위론의 관습을 몰라 실수 한 거야’하는 인식이 조금이나마 퍼졌을 테니까. 그래. 이게 바로 내가 노리는 거였어. 그 때 왈칵 성을 내는 시드. “그래봤자 저 녀석이 귀족들 곁에서 알랑거리는 백수라는 건 변하지 않아! 물려받은 돈으로 놀고먹는 한심한 새끼!” 그러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가 버리는데 회장이 녀석을 급히 쫓아갔다. 한심하다니...나도 뭔가를 하려고 고심하고 있단 말이다. 열이 가슴에 차오르지만 참을 수 밖에. 그나저나 시드 녀석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내 이미지를 좀 바꿔보려 했는데 녀석이 저런 소릴 지껄이고 간 탓에 애써 노력한 게 도로묵이 되었잖아. 물론 조금의 이미지는 바꿔 놓았겠지만. “우린 행사 준비가 있어서 가 봐야겠어.” 그 때 붉은 머리 미녀 루샤가 주변 분위기가 불편한 듯 그리 말하더니 내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 남은 세 명과 함께 회장이 간 쪽으로 따라갔다. 아무래도 아까 그 시드라는 녀석 청년회 간부였던 건가. 중간에 끼어들었던 소년도 어디론가 가 버린 듯 안 보이고, 그런 내 어깨를 알레그로가 쳤다. “처음부터 거하게 시작하는 군.” “이정도 까진 줄 몰랐는데.” “내가 분위기 안 좋을 거라고 했잖아. 어쨌든 그런 약은 수를 쓰다니, 제법이군.” “나도 고민을 많이 했으니까.” 일단은 아까 일도 있고 해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알레그로의 ‘피하면 꼴이 더 우스워진다’라는 속삭임에 별 수 없이 알레그로를 따라 여러 사람을 만나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떨떠름한 표정의 사람들과 인사하면서 느끼게 된 건데 알레그로 녀석 배배꼬인 성격답지 않게 발이 넓다. 시드처럼 시비 거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다행이 그런 사람은 그 후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인사하는 내게 비꼬는 사람이나 찡그린 표정을 하는 사람이나, 짧게 인사만을 함으로서 상대하고 싶지 않다라는 뜻을 드러내는 녀석들이 있었지만 그런 냉대는 견딜 만하니까. 참으며 미소를 짓고 안면을 트는 데 힘을 썼다. 그렇게 가볍게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샌가 연회장 한 쪽에 연주자들이 몰려 앉아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고, 시종들로 보이는 사람이 음식을 테이블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신년제 밤이 시작되기 시작하는 것을 사람들도 느낀 듯 분위기가 점점 달아올랐다. “네가 캐롤라인이지?” 누구지? 부르는 소리에 옆을 보니 인상 좋게 웃고 있는 한 때의 소년, 소녀들이 보였다. 녀석들은 화려한 예복에 척보이기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싸 보이는 귀금속과 보석으로 된 장신구들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위화감이 들 정도로 반갑다는 얼굴을 하며 내게 저마다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그 손들을 일일이 잡아 줄 수 밖에 없었다. “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너 엄청난 부자에다 귀족들과도 어울린다며?” “어울리는 정도는...” 어울린다고 해 봤자 에스트라가 방문하는 정돈데 사실 에스트라가 찾는 상대는 블레탈이니까. 그런데 내 소문이 안 좋을 텐데 이렇게 다가와도 되나? 녀석들은 내 떫은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멋져, 게다가 정말 잘 생겼잖아? 또 오는 길에 들었는데 너 외국에서 유학하고 왔다지? 정말 멋있다!” 살랑거리는 눈웃음을 치며 귀여운 얼굴의 여자애가 낯 뜨거운 소리를 들어놓았다. 잘 생겼다니...처음 들어보는 소린데. 떨떠름하게 고맙다고 하니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 웃는다. 그나저나 유학하고 왔다니 대체 또 언제 저런 말이 퍼진 거야? 그 때 그들 중심에 있던 백금발의 소년이 부드럽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너무 당황해서 의식하지 못했는데, 녀석은 굉장한 미소년이었다. 블레탈처럼 부담스러울 정도의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왠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인상이라고나 할까. 남자치고는 여린 선이나 살랑이는 백금색의 머리카락, 온화하게 뜬 부드러운 녹색 눈이 굉장히 따스해 보여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말았다. “난 테이크 레시온이라고 해. 너 같은 친구를 두고 싶었는데, 우리 친구할 수 있을까?” 목소리 또한 굉장히 부드러운 미성이다. 하지만 뭔가, 위화감이 든다. 특히 웃는 사람일수록 속을 모르는 법이니. 일단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줘야 하나. 그 때 알레그로의 싸늘한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트렸다. “친구는 무슨, 개 같은 면상 치우고 꺼져 승냥이 때들아.” 알레그로의 독설이야 익히 알지만 이렇게 까지 말하다니. 화나지 않았을까? 레시온과 그 친구들을 보니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웃고 있다. 단, 레시온의 경우 쓴 웃음을 머금었지만. “말이 심한 거 아냐? 내가 뭘 어쨌다고 화를 내는 거지? 난 단지 캐롤라인에게 친구가 되자고 한 것 뿐인데.” “흥, 가자.” 알레그로는 성큼 가버리고 나도 그 옆을 따랐다. 레시온의 쓴 웃음이 걸렸지만 알레그로에겐 이유가 있을 테니까. 어느 테이블 옆에 다다랐을 때 알레그로가 씹어 먹듯 날 바라보았다. “얼굴에 속아 헬렐레하긴.” “무슨 소리야.” “잘 들어. 저 놈들은 돈 푼 꽤나 있는 놈들에게 들러붙어 친구랍시고 탈탈 털어먹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야. 레시온 저 녀석의 얼굴에 속아 ‘난 아니겠지’하는 심정으로 저 녀석과 어울리다가 봉변당한 멍청이들이 수두룩하다고. 저런 놈들에게 어수룩하게 보여 뭘 어쩌자는 거야.” 레시온이? 믿기지 않지만 알레그로는 허튼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어쩐지 내게 거리낌 없이 다가오더니 그런 속셈이 있었던 모양이다. 왠지 가슴이 조이는 기분. 그래, 난 지금 엄청난 재산을 가진 녀석이니까 날 이용하려는 놈들도 많겠지. 사람이 날 미워하는 것도, 알랑대며 붙는 것도 문제로군. 갑자기 피곤해지는 것 같다. 테이블 곁 의자를 빼어 앉은 사이, 알레그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에 블레튜고를 따라 들이키곤 짜증스레 투덜댔다. “하이드 이 자식은 왜 안 나타나는 거야? 덕분에 저런 쓰레기들까지 설치잖아?” 표는 안 냈지만 주위 시선을 받느라 나 못지않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군. 문득 미안해졌다. 라인님이 안 계신 이상 귀족인 에스트라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왔긴 하지만 영 불쾌했다. 블레탈은 에스트라가 통째로 빌린 것이 분명한 텅 빈 고급 레스토랑 안을 훑어보며 가볍게 인상을 썼다. 레스토랑 안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중앙에 그들만을 위해 마련 된 듯한 고급 목재로 된 식탁과 의자. ‘연인놀음이라도 하자는 건가.’ 블레탈과 에스트라가 자리에 앉자, 시종이 소리 없이 다가와 전체와 식전에 마시는 가벼운 술을 내어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이 곡. 참 좋지?” 꿈을 꾸듯 몽롱한 푸른 눈동자를 내려 뜨며 말을 한 에스트라는 시종이 잔에 술을 따라주자 건배하자는 듯 블레탈에게 잔을 내밀었다. 블레탈이 마주 잔을 들자 에스트라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더니 잔을 들이켰다. 블레탈은 짜증이 났지만 묵묵히 술잔을 입에 댔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귀찮은 여자는 질색이었다. 그런 점에서 에스트라는 최악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노예에게 왜 자꾸 매달리는지.’ 차라리 라인님이 이런다면 좋을 텐데. 블레탈은 순간 쓴 웃음을 머금고 잔을 내려놓았다. ‘나답지 않은 생각을 하다니. 어쨌든 적당한 핑계를 대서 빠져나가야겠군.’ 신년제 행사를 빠지며, 이렇게 남의 눈을 피해 레스토랑까지 빌려, 라인님이 없는 틈을 타 자신을 데려왔다면 목적은 뻔한 것이다. 물론 에스트라님과 하룻밤을 보내도 상관은 없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에스트라님은 이상할 정도로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경험상 이런 여자와 보내면 골치 아파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블레탈?” 블레탈이 고개를 들자 화려하게 틀어 올린 금발에 진주로 된 머리핀을 한, 가슴까지 파인 연분홍 드레스의 에스트라가 홍조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엔 무심한 얼굴을 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청년이 담겨있었다. “신년제인데 저와 이렇게 계셔도 되나, 걱정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에 긴 보라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블레탈은 어느 책속에서 빠져나온 왕자 같았다. 청년과 소년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띈 깎아지른 이목구비와 차갑게 뜬 환상적인 보랏빛 눈동자, 만지면 미끄러질 듯 빼어난 콧날, 붉은 자줏빛입술 등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에스트라는 금방 얼굴을 붉혔다. “걱정해 주는 거야? 괜찮아. 신년제는 매년 참가하는 거라서 이번 한 번은 빠져도 상관없어. 그리고 시시한 모임보다는 너랑 있는 게 더 좋은 걸.” 그렇게 말하며 에스트라는 손수 술병을 들어 블레탈의 빈 잔에 채워주었다. 창으로 보이는 새파랗게 어두워진 하늘에 뜬 둥그런 두 개의 달과 흔들리는 촛불, 은은히 코를 미혹시키는 과일주의 향기. “아무래도 지금이라도 신년제에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목도 있으니까요.”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해. 자, 내 잔은 네가 따라주지 않을래?” 별 수 없지. 블레탈은 술병을 기울여 에스트라의 술잔에 따랐다. 그리고 일부러 실수인 척 컵을 건들며 술을 넘치게 했다. 그 바람에 술이 넘치며 에스트라의 드레스에 크게 얼룩을 남겼다. “앗!” “죄송합니다. 괜찮습니까?” 이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면 빠져나가면 되겠지. 그런데 에스트라는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않았다. 약간의 미묘한 열기가 띈 눈으로 블레탈을 보다가 미소를 지을 뿐. 왠지 불쾌한 느낌에 블레탈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에스트라가 손을 뒤로 돌려 드레스의 끈을 잡아 당겼다. “괜찮아, 이까짓 것. 벗으면 되니까.” 어느새 아까 전까지 있던 악사도 시종도 보이지 않았다. 넓은 레스토랑 안에 있는 건 에스트라와 자신 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드레스자락이 떨어진 순간, 창으로 비치는 달빛과 등불의 빛에 열 일곱 미소녀의 실루엣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흐늘대는 얇은 속옷 밑으로 비치는 탐스러운 가슴과 유려하게 매끄러지는 허리선, 탱탱하게 솟은 엉덩이와 기다란 다리. “내가 아름답지 않아?” 콧노래를 부르듯 유혹하는 에스트라는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순진한 소녀가 아니었다. 밝은 햇살과 같은 굽슬 치는 금발은 달빛의 요기에 찬란히 흔들리고, 풋풋한 내음으로 가득 찼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는 한 아름다운 존재를 갈망하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의 에스트라는 마치 밤에 나타나 뭇 남성들을 희롱하고 사라진다는 지독히도 유혹적인 몽마같았다. ‘젠장’ 저런 모습을 보고 욕정이 일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함께 솟는 욕지기와 경멸감은 블레탈의 머릿속을 차갑게 적셨다. 자신의 이 같잖은 껍데기에 홀려 허우적대는 꼬락서니라니. 게다가 순진한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블레탈은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를 주워 에스트라에게 내밀었다. “입으십시오.” “그런 건 이제 필요 없잖아.” 에스트라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우윳빛 손을 내밀었다. 아찔하게 내려뜬 푸른 눈과 붉은 입술, 그 밑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목과 우묵하게 파인 가슴에 절대적인 자신감이라도 가지는 듯 보였다. 블레탈은 소리 내어 비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등을 돌려 문 쪽으로 성큼 향했다. “그렇다면 시종을 불러 새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거기 서!” 그제야 거절당한 것을 안 듯 잔뜩 날이 선 목소리. 그가 등을 보인 채 멈춰 서자 에스트라의 자존심이 상한 듯 떨리는 목소리가 텅 빈 레스토랑 안을 울렸다. “난 아름답고, 지위도 있어. 뭐가 문제야?” “귀한 아가씨와 저 같은 노예가 이럴 수는...” “흥, 집어 쳐.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순진해서 그러는 거야? 노예랑 즐기는 귀족이 한 둘인 줄 알아? 게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데 뭐가 문제지?” 상당히 낭만을 따지는 듯한 에스트라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걸 보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화가 나면 얼마나 잔혹해지는지 알고 있는 블레탈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니까 말이다. ‘재수 없게 됐군.’ 이래서야 오늘 성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유달리 자신의 몸에 관심이 많은 귀족이니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그 때 블레탈의 가슴을 에스트라의 비아냥거림이 찔렀다. “맞춰볼까? 캐롤라인 때문이지?” 에스트라님과 같이 있을 때는 표시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낭패였다. 단단히 속이 꼬인 에스트라님이 라인님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아닙니다, 제가 거절한 건 아가씨를 생각해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너 라인을 사랑하는 거지?”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뭔가가 머릿속에서 깨지는 듯한 충격. 쿵쿵쿵쿵... 그 소리는 혈관을 타고 터지는 듯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사랑, 사랑이라고? 내가? 사랑을 한다고? 블레탈은 흔들리는 눈을 한 채 에스트라에게 등을 돌렸다. 달빛 아래 요염하게 선 에스트라는 질투와 상처 받은 자존심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맞췄지? 사랑하는 거 맞잖아.” 사랑, 사랑, 사랑. 생각도 못했다. 목욕하고 나오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싶었던 것도, 조용하고 잔잔한 빛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며 가슴이 일렁였던 것도, 유달리 창백한 얼굴빛을 보면 가슴이 쑤셨던 것도, 그림을 고개 숙여 그릴 때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에 저절로 손이 가는 충동을 느꼈던 것도, 그의 잔잔한 미소를 보면 가슴이 따뜻해졌던 것도 그래서였나. 그게, 사랑이었나. 사랑...사랑! 깨달은 순간 첫 얼음을 깨고 겨울잠을 끝낸 물고기의 것 같은 파닥거림이, 온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쿵쾅거렸던 심장은 이제 주체할 수 없는 갈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달음박치기 시작했다. 그건 생전 처음 느끼는 희열이였고, 경이였다. 사랑! 내가 그를 사랑한다! 만지기 두려울 정도로 완벽한 곡선을 이루던 눈썹이 부드럽게 희어졌다. 차갑기만 했던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자수정 빛 눈동자가 봄날의 빛에 닿은 듯 따스한 빛을 머금고, 섬세한 콧날 밑 붉은 입술에 유쾌한 듯한 웃음이 걸렸다. 뭐라 형연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미소가 미청년의 얼굴에 걸리려는 찰나 지독히 싸늘한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입가를 굳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거 알아? 오늘 일 캐롤라인이 허락했다는 걸.” 치솟던 온기가, 치솟던 기쁨이 단박에 얼어붙었다. 뭐라고? 방금 이 여자가 뭐라고 한 거지? 충격으로 굳은 블레탈의 눈을 바라보며 에스트라는 잔인하게 웃었다. “내가 주인의 허락 없이 멋대로 남의 노예를 훔쳐다 쓰는 무례한 여잔 줄 알았어? 어제 네 주인을 찾아가 말했지. ‘블레탈과 밤을 보내고 싶어요.’라고...” “그만하십시요...” 머리가 멍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일 거야. 에스트라가 팔라고 했을 때 절대로 자신을 넘겨주지 않던 라인님이다. 그럴 리가 없다. “허락받기가 수월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승낙하던데? 역시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값어치 나가는 걸 줘야 했던 모양이야?” “그만...” “뭘 줬냐고? 타자리하산 블루 사파이어와 금세공으로 된 펜이지. 유명한 장인들이 몰려 만든 거라 나도 그거 사느라 상당히 돈을 썼어. 하지만 캐롤라인의 수준을 맞추려면 뭐...” “그만해!” 피범벅이 된 가슴. 블레탈이 격정을 못 이겨 에스트라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잡고 밀어뜨린 건 순간이었다. 하지만 블레탈의 상쳐받은 가득 찬 눈에 비친 에스트라는 겁먹은 기색 없이 비틀어진 승자의 미소를 하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상황파악 좀 해줬으면 좋겠어.” “......” “네 주인이 너와의 밤을 내게 팔았으니 이대로 가면 안 되는 거잖아? 블레탈...” 밤을 팔린 노예. 그 말이 다시금 블레탈의 가슴을 잔인하게 헤집고 지나갔다. 하지만... 블레탈은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밑에 깔린 에스트라를 노려보며 살을 깎는 심정으로 말했다. “난 그를 알아. 그가 그럴 리 없어...!” 그건 믿음에 대한 확신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향한 필사적인 외침이기도 했다.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두 소년 소녀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놀란 듯 떠진 푸른 눈이 또다시 상처 받은 자존심으로 일그러졌다. 블레탈이 몸을 일으키려는 그 때 하얀 손아귀가 블레탈의 어깨를 붙들었다. 블레탈이 내팽겨 치려는 찰나 에스트라가 표독스레 외쳤다. “날 모욕하고도 네 주인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블레탈은 일으키려던 몸을 굳히고 말았다. 라인! 그가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머리가 아찔해졌다. 순간, 끔찍했던 일 주일 전의 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알레그로라는 녀석의 칼에 라인님의 하얀 목덜미가 배일 듯 닿인 그 광경이! 그런 그의 떨리는 목을 에스트라의 하얀 팔이 휘어 감았다. “걱정 마, 너 같이 건방진 놈과는 오늘 일만 치르면 끝일 테니까.” “......” “누가 너 따위...” 그러며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에는 분명히 참다못해 북받쳐 나온 습기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고통과 분노에 찬 블레탈의 귀엔 그것이 들리지 않았다. 가슴을 괴롭히는 의심과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치욕감, 그리고 라인의 안위를 빌미삼아 협박하는 그녀에 대한 분노. 아까 전까지 환희로 들떴던 가슴이 요동쳤던 심장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다. 이 여자. 에스트라 때문에! 블레탈은 이를 악물며 금발의 소녀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그나마 있던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탄사도 터져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껍데기를 안기위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그를, 소중한 그를 위협하는 구역질나는 벌레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원한다면 실컷 박아 드리죠.”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는 잔인하게 빛났다. 데스텐은 피엘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러들으며 멍한 초록색 눈을 떴다, 감았다. 신년제 준비를 대충 돕고 잠시 잔다는 게, 피에의 손에 깨어보니 벌써 밤이었다. 아마 피엘이 객실에 고꾸라져 자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내일 아침까지 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좀 빨리 빨리 움직여! 모임에 얼굴은 비쳐야 할 거 아냐!” “아직 자정은 안 지났지?” “그래, 잠탱아.” 아무래도 행사 준비로 생각했던 이상으로 피곤했던 모양이다. 얼른 피엘과 함께 일층으로 내려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데스텐의 눈에 어두워진 회장안의 사람들이 벌써 촛불을 손에 든 채 엄숙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자정이 되기 전에 하는 신년제 행사가 벌써 시작된 모양이었다. 친구인 피엘이 손에 쥐어 준 초를 들고 옆 사람의 불을 빌려 촛불을 켤 무렵, 올해 일흔 넷의 회장 엔치오 보르시스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1329년도 가고 1330년이 성큼성큼 오고 있소. 한 해 동안 어떤 사람은 죽었고 어떤 사람은 태어났으며 어떤 사람은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일어섰을 것이오. 그런 변화가 삶이고 시간의 흐름이오. 우리가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붙잡아 두는 방법은 순간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뿐이지. 부디 신년에는 좀 더 길게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매년 그렇듯 연로한 회장의 신년사는 짧고 철학적이었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회백색 머리의 노인이 단상에서 내려서자 데스텐과 피엘을 포함한 연회장의 사람들은 짧은 묵상의 시간을 보낸 후 종소리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신년이 되면 왕성의 종소리를 시작으로 온 왕도에 있는 종들을 울리는데 그것을 들으며 사람들은 축복의 메시지를 나눈다. 얼마쯤 지났을까 창밖에서 댕댕댕하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며 밖에서 요란스러운,‘신년이다! 새해다!’하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그와 함께 연회장안에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곁에 있던 사람을 껴안으며 기뻐하기 시작했다. “신년에는 원한 바 이룰 수 있기를!” “신년의 축복을 당신에게!” 온통 사방이 시끌벅적해지며 사람들이 들고 있던 촛불이 촛대로 옳겨 졌다. 데스텐 또한 피식 거리며 피엘에게 인사를 건냈다. “복 받아라.” “너나 받아, 짜샤.” 쑥스러운 듯 콧잔등을 비비는 피엘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다 데스텐은 낯선 주위 사람들과 신년 인사를 주고받은 후 대충 초를 촛대에 끼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에서야 생각났지만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누굴 찾는 거야?” “낮에 말했잖아. 그 그림 그린 사람.” “그 녀석을 만나서 어쩌려고?” “뻔하잖아. 그리고 몸 달아하는 스승님과 대면시켜 드려야지.” “으휴. 백날 그런다고 네가 찾을 수나 있겠냐? 이리 와봐.” 데스텐은 어깨를 으쓱 거리곤 피엘의 뒤를 쫓았다. 이리저리 사람과 부딪히고 시끄러운 게 영 맘에 들지 않아 본래 신년제행사가 끝나면 바로 집에 가곤 했지만, 오늘은 꼭 그 사람을 만나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니, 솔직한 심정은 그냥 삼 년 전에 죽은 그 녀석을 미묘하게 닮아있는 여자를 그린 화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친구인 피엘이 중간 중간 또래의 청년들에게 뭐라 질문을 할 때 마다 청년들은 금방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키며 뭐라 떠들었다. 그러길 몇 번 쯤 했을까 데스텐이 피엘에 이끌려 또다시 어디론가 가려는 찰나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잠탱청년과 안경돌이!” “누가 안경돌이라는 거냐? 미래의 대문호에게 못할 소리가 없군.” “대문호가 얼어 죽었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건 데스텐, 피엘과 같은 소학교 동창인 칠렌이었다. 우람한 몸집에 짙은 눈썹을 한 칠렌은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피엘의 갈비뼈 근처를 쿡 쑤셨다. “뼈가 잡히네. 이건 남자로써의 수치야! 남자라면 나 같은 근육을 키워두라고!” “됐네! 네 놈이 창작 스트레스로 위통에 고생하며 비쩍비쩍 말라가는 글쟁이의 심정을 어찌 알겠냐? 네 근육은 잘 먹고 맘 편히 사는 일반인들이나 누리는 사치야! 알아?” “어허. 근육이 먹고 자기만 하면 붙는 줄 아냐? 근데 아까부터 봤는데 너희들 뭘 찾는다고 그렇게 서성 대냐?” 그런 칠렌의 뒤로 일행인 듯 몇 명의 남자와 여자가 다가왔다. 칠렌이 자신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자 온 모양이다. ‘여러 사람이랑 얽히긴 싫은데.’ 데스텐은 귀찮으니 빨리 보내줘야 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이라는 화가를 찾고 있어.” “캐롤라인? 그 녀석이 화가였어?” 대뜸 끼어든 청년 하나가 놀랍다는 듯 소리치는 폼을 보니 피엘이 떠벌 거릴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유명한 사람인 듯 했다. 데스텐이 고개를 끄덕이자 칠렌 패거리의 소녀 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탄성을 질렀다. “멋져! 예술가라니! 그럼 그렇지, 캐롤라인님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한량일 리가 없어요!” “그 자식이 화가면 화가인 거지 감탄할 필요까진 어딨어? 그리고 거북스레 ‘님’은 또 뭐냐?” “아아! 밤하늘을 닮은 이국적인 머리카락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이따금 얼굴에 맺히는 잔잔한 미소! 게다가 무례한 상대에게도 매너를 갖춰 대하는 그 아량과 기품과 고귀함이 절로 뿜어져 나오는 몸가짐! 게다가 엄청난 부자이기까지! 이 정도면 ‘님’을 붙여야지 누구에게 님을 붙여요?” 피엘의 말에 따르면 상당한 악평의 소유자였던 것 같은데... 소녀와 청년의 투닥 거림에 데스텐이 피엘을 바라보자 피엘 또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피엘을 마주 보았다. 그런 둘에게 칠렌이 말했다. “사실은 지금 그 ‘캐롤라인’ 때문에 연회장이 온통 북새통이야.” “왜? 그 녀석이 무슨 일이라도 쳤어?” 피엘이 묻자 칠렌이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코를 긁적였다. “뭐 일이라면 있긴 하지. 연회 시작쯤에 청년회의 시드가 녀석에게 시비를 건 것부터 시작해서, 그 녀석에게 시비를 건 머릿수만 헤아려도 스무 명은 족히 넘을 걸? 지금도 어디의 누군가가 녀석 앞을 막고 시비를 걸고 있을 테지.” “그렇다면 저 반응은 대체 뭐야?” 피엘이 손가락으로 ‘캐롤라인 찬양론’을 연신 펼치는 소녀를 가리키자 칠렌이 데스텐과 피엘의 양쪽 어깨를 잡으며 진지하게 눈을 부라렸다. “한 가지만 묻자. 그 녀석 진짜 중인이냐? 아니, 혹시 부모 한 쪽이 귀족이거나...” “모르겠는데.” “왜 그걸 우리한테 묻냐?” “너희들 그 녀석이 화가라는 것 까지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물었지. 으아, 궁금해 미치겠네!” 머리털을 쥐어 잡는 몸집 큰 청년을 데스텐과 피엘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은 유달리 궁금한 게 있으면 미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나 그 녀석을 봤는데, 세상에 그런 놈도 있구나 싶더라.” “대체 어떻기에?” 답답하다는 듯 피엘이 물었다. “재수 없는 놈 면상이나 구경하자란 심정으로 놈을 보러 갔는데, 하...그...책에서나 나오는 기품이라고나 하나 뭐라고 하나...마치 ‘나는 완벽한 환경에서 배양된 도련님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오로라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더라!” 소설을 너무 봤군. 데스텐은 이 어이없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좀 더 기다리는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그 행동거지나 말투도 절도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게 넘쳐서 왠 귀족이 잘못 참석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구. 소문으로 듣던 캐롤라인이라는 녀석이 맞는지 의심해야 했다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을 걸?” “그런 이유만으로 저런 반응이 나타났다고?” 짜증 섞인 얼굴로 피엘이 다시 소녀를 가리키자 칠렌은 그제야 자기가 너무 흥분한 걸 안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니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 그 녀석 국외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데. 엘위론에선 다른 지역으로 가면 ‘회’에 얼굴을 먼저 비쳐야 한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야. 그 녀석이 살던 곳에선 초대장을 받아야 찾아 간다나?” “참나! 여기가 엘위론이지 지가 살던 곳이냐?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을 따라야지!” “아무튼 그래서 여러 사람이 이해해 주자 식으로 돌아선 모양이야. 게다가 녀석, 시비를 거는 녀석들한테 절대 인상을 쓰지 않던데. 굉장히 매너 있게 대해서 시비 거는 녀석들이 도리어 당황하는 모양이더라고. 덕분에 개 같은 성격이라는 말들이 쏙 들어갔지.” “그래서 그 사람은 지금 어딨는데.” 이제 한계다. 데스텐이 묻자 칠렌이 안내해 주겠다며 둘을 이끌고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비집기 시작했다. 덩치 큰 칠렌이 장애물(?)들을 제거해 준 덕에 매우 편하게 움직인 둘은 곧, 웅성대는 사람들 틈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었다. “왠지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아아, 또 시비가 붙었나보군.” 칠렌, 데스텐, 피엘은 사람들 틈을 어렵사리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워낙 몰려든 사람이 많아 누가 싸우는 지 데스텐은 볼 수가 없었다. 코에 부딪히는 다른 사람의 머리와 사방에서 몸을 압박하는 사람들의 몸에 짜증스럽기만 했다. 단, 키가 큰 칠렌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소리를 냈지만. “이거, 의외로 유명한 녀석들이 몰려들었잖아? 저런 녀석들이 남의 싸움 구경하는 취미도 있었나? 레오 사헤온, 필란 에오시스, 오 우리의 레이디 에츠피그양도 계시는 군!” 정말이다. 데스텐은 사람들의 뒤통수 틈으로, 여느 때처럼 매혹적인 싸늘한 눈으로 상황을 관전하는 은발의 청년 레오 사헤온과 뭐가 그리 걱정되는지 주먹을 오므렸다 폈다 하고 있는 늘씬한 미녀 에츠피그, 그리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상황을 보고 있는 필란 에오시스를 각 귀퉁이에서 한 명씩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싸움이 격해진 듯 안쪽에서 험한 말이 들리더니 주위 사람들이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헌데 한 쪽에서 더 기겁한 젊은이들의 놀란 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치 바다가 갈리듯 그 주위로 젊은이들이 비켜섰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아까 전까지 몰려 있던 사람들이 다가오는 무언가가 두렵다는 듯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지?’ 어쨌든 좀 숨통이 트여 살겠다는 생각을 하며 데스텐은 뒤에서 붙잡는 칠렌과 피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 안쪽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들어가니 상황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멱살이 잡혀있는 붉은 옷의 소년과 소년의 멱살을 잡고 있는 녀석. 그리고 그 뒤로 있는 녀석들의 패거리. 그들은 무언가 매우 두려운 얼굴로 맞은편에 나타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만 장발에 황금색 눈동자를 한 검은 예복의 소년. ‘누구지?’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와 잘 생긴 얼굴에 담긴 왠지 소름끼치는 미소라니. 저런 분위기라면 마족이나 악마의 모델로 써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런 데스텐의 귀로 두려움에 질린 ‘하이드! 사욘 하이드야!’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하이드? 아, 저 녀석이... 데스텐은 무심코 피엘 녀석이 떠들었던 수많은 소문 중 몇 가지를 떠올리고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기사 셋의 늑골을 부러뜨리고, 매일 노예를 찢어발기는 것을 취미로 삼는다는 잔혹한 녀석이 저런 호리한 체구인 줄은. 하지만 소문의 그 녀석이건 아니건 흥미를 가질 이유도 공포에 질릴 이유도 없었다. 사욘가의 사람은 꼴도 보기 싫을 분더러...데스텐은 하이드라는 녀석이 붉은 옷의 멱살을 잡고 있던 녀석을 한 손으로 머리채 잡아내어 테이블 위에 내다 꽂는 것을 무심하게 힐끔거리곤 그들을 찬찬히 살폈다. 대체 저 중 캐롤라인이 누굴까? 데스텐은 자신의 타고난 동물적 감각을 믿었기에 금방 알아낼 수 있다고 믿고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갈색 더벅머리? 아냐, 척보기에 감수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눈이야. 저 납작코? 아니지, 위협하듯 주먹을 들고 있잖아? 예술가가 맨 손을 함부로 휘두를 리는 없지. 약간 사팔뜨기 눈을 한 저 녀석? 아냐, 저 놈도 저 놈도, 저 놈도 아니군. 멱살 잡혔던 저 녀석인가? 붉은색 예복을 센스 입게 갖춰 입은 싸늘한 인상의 소년은 멱살 잡힌 게 언제였냐는 듯 시니컬한 태도로 상대 패거리의 약을 단단히 올려놓고 있었다. 데스텐은 그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림의 정적인 분위기를 떠올리면 작가가 저 녀석이라고 결론짓기엔 상당히 꺼림칙해. 그렇다면 남은 녀석은 하난데... 하이드를 만류하는 소년을 뜯어보던 데스텐의 눈은 순간 의문으로 가득 찼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윤기 나는 검은 색 머리카락과 창백하지만 분명한 상아색을 띈 흰 피부, 새까만 눈과 조금은 낮은 콧날,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중성적인 이목구비와 호리호리한 체구. 소년을 뜯어보면 볼수록 데스텐의 초록색 눈은 크게 흡떠졌다. “믿을 수 없어...!” 내가 환상을 보는 걸까? “제 뺨을 쳐주세요.” “예?” “빨리! 지금 당장!” 데스텐의 박력에 옆에 있던 사람이 지레 놀라 그의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 그러고선 휘둥그레진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이며 허둥지둥 자리를 비켰다. 아프다. 데스텐은 얼얼한 뺨에 손을 대고 소란 가운데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꿈이 아니야. 저 녀석은...! “시헬 케인...!” 삼 년 전 죽은 자신의 친구였다. 1부 완결